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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시계탑 1층에는 시계탑의 역사를 확인 할 수 있는 역사관이 있습니다. 비록 한국어 설명은 빈약하지만 그래도 간간히 간단하게 작성되어 있더군요. 간단하게 몇가지만 추려서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계탑의 연혁


시계탑은, 현재의 북해도대학의 전신인 삿포로 농학교의 연무장으로서 1878 년에 세워졌습니다. 연무장은, 강의실, 표본실, 실내체육장, 각종 행사장의 기능을 함께 갖춘 건물이었습니다.

1903 년부터 1940 년대 초까지는 교육단체의 사무소, 부속 도서관, 문화 활동의 장소로 이용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 년부터 전후의 1948 년까지는 군용시설, 각종 민간단체 사무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후 1950 년부터 1966년까지 시립도서관으로 사용되었고, 도서관 이전에 따라 1967 년에 복원 공사를 하였습니다. 1970 년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일본 구 제국대학 중 한군데인 북해도대학의 전신, 삿포로 농학교의 연무장 건물이던 우리의 시계탑은 1878년에 세워졌으며, 여러 용도변경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합니다.


근 150년 가까이 된 서양식 건물인 우리의 시계탑은, 학교 캠퍼스 내 부속건물이던 셈이죠.



그 외에도 북해도 대학의 전신인 개척사 가학교와 여학교등의 소개도 이어집니다.


북해도 개척사의 가학교로 1872년 개교한 초기의 학교 졸업생들은 북해도 개척과 관련된 사업에 의무적으로 종사를 하게 했답니다. 일본의 북해도 개척 당시 나름대로 큰 일을 했던 사람들은 이 가학교 출신이겠지요.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두번째로 여학교를 개교하기도 했답니다.


다만 가학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폐교가 되었고, 약 2년 뒤 삿포로시로 자리를 옮기며 삿포로 학교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개교를 합니다. 지금의 시계탑이 있는 자리 일원이 바로 삿포로 학교가 옮겨온 부지입니다.



1876년 3월. 농과대학이 개설하며 본격적으로 삿포로 농학교라는 명칭으로 출범합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농과대학의 학장이였던 미국인들을 교사로 고용하면서 본격적인 근대 고등교육기관으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미국인들이 당연히 메사추세츠 농과대학에 근무했던 교직원들인 만큼 당시 미국의 농업기술이나 메사추세츠 농과대학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가지고 오기도 했답니다.



개교 당시 삿포로 농학교의 모습



150년의 세월을 버티며 우뚝 서있는 연무장. 시계탑 건설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개교 당시 고용된 미국인 교장 클라크는 나름대로 학생들이 거주하는 기숙사라던지 연무장 강당 등 농학교의 시설 확충에 관심이 많았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부임한 휠러 교장대리가 구체적인 연무장을 포함한 여러가지 학교 건물의 건설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고 하네요. 


초창기 계획안 상으론 연무관 건물은 종루가 달린 2층 벽돌건물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결국 계획의 축소로 인해 2층 목조건물로의 건축이 결정되었다 합니다. 그렇게 1878년에 5월에 최종적인 건축허가가 나왔고, 그 해 6월 착공에 돌입합니다.



그렇게 농학교 연회장은 착공 4개월만에 완공되었고, 대학 본관으로의 역활도 겸했다 합니다.


다만, 처음 농학교 연무장 건물엔 시계가 없었습니다. 당시 개척장관이던 쿠로다 기요타카가 연무장 종루에 시계를 달아보라는 명령을 내려 탑시계를 장착하게 된 일이죠. 농학교 교장 직무대리인 휠러는 미국의 하워드社에 시계를 주문하였고 1879년 6월에 주문했던 시계는 도착했습니다.


다만, 시계 사이즈가 연무장 종루보다 훨씬 큰지라 다른 건물에 대신 설치를 하는 방안이 고려되었고, 결국은 교장대리 휠러의 설득 끝에 연무장 종루를 뜯어 고쳐서 탑시계를 달게 됩니다. 그렇게 1881년 8월 12일에 시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하는군요.


P.S 쿠로다(구로다) 기요타카는 일본의 2대 총리를 역임한 정치인. 우리에겐 운요호 사건을 매개로 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의 주역으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



당시 농학교의 교육과정은 메사추세츠 농대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고로 100%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였고, 당시 일본 최고의 영문학자도 배출했다 하는군요. 여튼간에 이게 일본인이 쓴 영문인지 미국인이 쓴 영문인지 그냥 봐선 모를 정도로 아름다운 필기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농학생들은 오전에는 4교시의 학습과 1교시의 복습시간, 오후에는 현장실습 위주의 수업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즈음 학교와 별 다를 것 없이 운동회 그리고 학예회까지 진행했다 하는군요.



札愰農學校創基25年祝典 (찰황농학교창기25년축전)


농학교 설립 25주년 축전 당시 사진. 재학생 그리고 교직원들이 지금의 시계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명치(메이지)34년이면 서기 1901년이죠. 쇄국정책을 펼치던 조선과 달리 서구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던 일본은 이 시절 사진 기록들도 우리나라보단 꽤 많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농학교 모형.


셔터스피드가 영 좋지 못했던지라.. 강의동과 관측대 그리고 실습을 위한 공간들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층 빌딩으로 뒤덮인 시계탑 근처입니다만, 그시절엔 작은 단층 가옥들 위주였네요.



보수공사 당시 떼어낸 건축 초기 자재들 역시 폐기처분 하지 않고 잘 보관하여 전시중입니다.



150년의 세월을 삿포로 시민들과 함께했다 보니 여러 문학작품 그리고 음반속에서도 시계탑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시계 기술자이던 이노우에 키요시씨는 96년 99세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약 반세기동안 시계탑 유지보수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삿포로를 대표하는 시계탑은 많은 시민들의 보살핌으로 오랜 세월 유지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2층으로 올라갑니다. 옆에는 장애인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건물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엘리베이터 박스를 만들었더군요. 몸이 불편한 사람일지라도 손쉽게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작은 공연장을 바라보고 있는 나무의자.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시계탑의 구조와 구동 원리를 설명하는 영상이 상영중입니다.



족히 30년은 넘어보이는 영상이지만, 관람객들은 집중하면서 아주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시계부분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


추를 달고 있는 로프가 보입니다. 물론 150년의 세월을 함께한 로프는 아닐테구요.. 분명 노후화가 되었을테니 못해도 대여섯번 이상은 교환해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작은 모형으로 커다란 시계의 구동모습을 똑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은 톱니가 움직이면서 큰 톱니도 움직이고 그렇게 로프를 감고 풀어가면서 시계바늘은 돌아갑니다.



시계탑 관람을 하고 나오니 4시에 가까워 지더군요.


고로 다시 호텔로 돌아갑니다. 호텔에서 잠시 쉬다가 또 열심히 돌아다녀야죠.


7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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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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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나왔습니다. 슬슬 호텔에 들어가서 체크인을 해야지 싶은데, 뭔가 건물이 하나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 건너편에서부터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한번 들려보도록 합니다.



빨간 지붕을 가진 하얀 목조건물. 그리고 우뚝 솟은 시계. 시계탑 건물입니다.


처음엔 이게 그렇게 유명한 건물인 줄 몰랐습니다만, 삿포로시의 상징. 더 나아가 홋카이도 전체를 상징하는 상징물 중 손에 꼽는 시계탑이랍니다.



旧札愰農學敎演武場 (時計台) [구 찰황농학교연무장] (시계대)


그렇습니다. 본래 이 건물은 삿포로농과대학 연회장으로 이용되던 건물인데, 현재는 삿포로역 북서쪽의 국립 홋카이도대학 삿포로 캠퍼스로 옮겨가면서 구 농학교 건물 중 이 시계탑만 남았다고 합니다. 일본 내에서도 나름 최고로 치는 구 제국대학중 한곳으로 명성을 날리는 학교지요.


여튼간에 시계탑으로 유명한 이 건물은 무려 140년 넘는 세월을 이곳에 서 있었습니다.



시계탑은 그냥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럼요. 저 오래된 건물의 유지보수 그리고 시 재정의 확보를 위해선 입장료를 받는게 당연하겠죠. 입장료는 그래도 다른 사설 기관이 관리하는 박물관이나 문화유적에 비해 저렴한 편 입니다. 


고등학생 이하는 무료. 단체관람객은 180엔, 일반 관람객은 200엔입니다.



입장합니다. 비록 가난한 티스도리지만 그래도 200엔이라는 거금을 낼 여력이 있습니다.


돈을 건네니 매표소에서 카와이한 처자가 입장권과 안내 팜플렛을 받아옵니다. 비록 한국어 안내는 전무하다시피 해서 빈약하다만, 그나마 일본어보다 조금 더 알아듣기 편한 영어 문장을 보고 의미를 유추해보곤 합니다.



Fannie Pio


사연이 많은 인형입니다. 물론 이 글을 보고 있는 우리보다도 나이가 많고 말이죠. 미국 뉴저지주에 거주하던 Sidney Lewis Gulick(시드니 루이스 글릭)이라는 선교사가 일본에서 약 20여년을 지낸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뒤, 매년 히나마츠리(일본의 여자어린이날) 행사를 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행사를 개최하며 미국과 일본의 친선을 목적으로 자원봉사자와 기금 모금을 통해서 옷을 입히고 잘 가꾸어서 일본 각지의 학교와 유치원에 배부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인형도 그렇게 일본에 오게 되었답니다.


여권과 함께 이런저런 살림살이도 일본으로 넘어왔는데.. 1989년 와키바 유치원 원장이 삿포로시에 기증을 해서 약 28년 가까운 세월을 시계탑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시계탑에서 살겠죠. 비록 인형을 가꾸고 꾸미던 사람들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겠지만, 인형은 영원합니다.



시계탑 입장권과 연혁이 소개된 팜플렛입니다.


한국어 설명은 없어서 그냥저냥 훑어 읽는 수준으로 어렴풋이 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ㅠㅠ


시계탑 1층에는 인형과 함께 삿포로시의 역사와 다른 문화재에 관련된 소개 그리고 시계탑과 삿포로 농업대학의 연혁에 관련된 소개로 구성되어 있답니다.



찰황의 역사. 이런식으로 열람이 가능한 다양한 장르의 역사책들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삿포로의 양사라고 적힌 책 옆에 저연령층 상대로 제작된 역사책으로 보이는데 말이죠..


역사책에도 네코미미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여긴 일본입니다. 자각하고 있었네요.



오랜 세월을 견뎌낸 시계탑과 꽤 오래되어 보이는 책걸상입니다.



창들 역시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누군가가 창문을 통해 물건을 주고받다가 난 흠집일 수 있을테고요. 옷에 스쳐서 혹은 무언가에 스쳐서 생긴 흠집일수도 있을겁니다.



자취를 감춘지 꽤 오래된 CRT 모니터가 있습니다.


나름 시계탑의 역사와 사진을 계속 보여주는 모니터인데 이래저래 교체할만도 한데 고장이 나지 않는건지 계속해서 쓰고 있더군요. 매일같이 켜놓아서 수명이 다 되었을 법도 한데 오래오래 버티고 있습니다. 



구 삿포로 농학교 연무장. 그리고 국립 홋카이도 대학교 농업대학 건물들..



북해도내 다른 문화재에 대한 설명도 있습니다.


우리내 아저씨들과 비슷한 복장(등산복)을 입고 관람을 오신 스시남 아저씨들도 자기가 여길 가봤다 저길 가봤다 하면서 이야기를 하시던데 말이죠. 저도 4일을 내리 돌고 돌면서 이렇게 사진으로 전시된 건물 중 몇군데를 가보고 들어가보기도 했답니다.


6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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