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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초딩일기로 찾아왔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아마 정상적인 학사일정이라면 다음 달 이맘때쯤 봄소풍을 가겠죠. 코로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2002년 4월 봄 소풍은 그냥 하루 종일 당진지역의 주요 시설과 유적지를 순회하던 소풍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초등학교 3학년 사회 교육과정에 우리 지역에 대해 배우는 과정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따로 지역 교육청에서 배부하던 참고용 교과서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요. 여튼 7차 교육과정 시절만 하더라도 그랬습니다. 말 그대로 교과목과 연계된 현장체험학습이었는데, 다른 학년들은 놀이공원을 비롯하여 타 지역으로 나갔지만 3학년만 당진을 순회하고 말았습니다.

 

여튼 보고 오시죠.

 

2002년 4월 23일 제목 : 소풍


제목 : 소풍

 

오늘은 아침 일찍 소풍 준비를 하였다.

내가 온 뒤 선생님이 금방 오셨다.

버스에 탈 시간이다. 엄마가 떡도 주시고, 아줌마가 음료수도 주셨다.

첫 번째 도착지는 상록수를 지으신 (심훈) 선생님이 집. 집을 지어서 상록수를 1934년에 집필하였다.

이름이 어려움(아마 석문방조제로 추정됨) 방조제에 갔는데 아래가 바다였다.

한보철강은 그냥 조금도 안 보고 지나갔다.

당진화력발전소는 생산되는 전기의 양은 얼마인지 영화로 보았다.

대호방조제는 돌아다닐 곳도 많았고 영탑사까지 가는데 1시간 50분이 걸린 것 같았다.

그곳에 7층 석탑을 보았는데 사진으로 어떻게 찍었나 모르겠다.

나는 소원을 빌고 갔다. 즐거운 소풍이었다.

 


 

그냥 하루종일 버스만 타고 당진 시내 주요 관광지와 시설을 둘러보았습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당시 탔던 버스는 쌍용 트랜스타. 이전에 올드카 목격담에서 트랜스타를 다뤘을 때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소풍에 트랜스타를 탔던 기억이 있다는 내용을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떡도 주시고 아줌마가 음료수도 주셨다는 부분은 봄 소풍을 맞아 자모회에서 찬조를 했던 음식물로 기억합니다. 이외에도 심훈 선생님이 기거하시며 소설 상록수를 집필하셨던 필경사도 지금은 그럭저럭 기념관도 생기고 볼만한 관광지가 되어있습니다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냥 안에 먼지가 들어가고 벌레가 들어가도 방치해두던 복원된 생가 말곤 없었습니다. 필경사 이야기도 이전에 6학년 일기에서 다뤘던 내용을 초딩일기 포스팅으로 다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름이 어려운 방조제라고 해야 석문방조제. 그리고 지금은 현대제철로 이름이 바뀌고 당시 규모에 3배 이상 확장을 하게 된 한보철강을 지나쳤네요. 20년이 지난 지금도 현대제철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거의 매일 그 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니 뭔가 새롭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그나마 좀 오래 머물렀던 곳은 당진화력발전소와 대호방조제 한복판의 도비도. 면천의 영탑사로 기억합니다. 당진화력에서는 홍보영상을 보고, 직원분이 버스에 탑승하셔서 발전소를 한바퀴 돌며 설명을 해주셨고 꽤나 좋은 볼펜을 기념품으로 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점심 도시락은 영탑사에서 먹었네요. 영탑사의 7층 석탑은 다른 석탑과 달리 암반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축조되었고, 일부 소실되어 5층만 남아있었으나 1920년대 신도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상태라고 합니다. 

 

여튼 다른 학년들은 타지역으로 나갔으나, 그저 집 근처의 볼거리를 보러 나갔다고 아주 재밌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즐겁게 느꼈나 보네요. 다른 장소들은 다 최근에도 지나가거나 보러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영탑사만 이후 가 본 적이 없네요. 시간 날 때 들려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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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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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 나는 도태되었고 실추될 명예와 이미지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내 치부를 스스로 밝히는 사람이다. 04년 당시 있었던 일이나 어제 달렸던 댓글이 타인이 보기엔 기분 나쁘게 보였으리라 생각할지 몰라도 아직도 내가 수백 명 앞에서 개망신을 당해가며 혼날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하기에 긴 글을 적어본다.

3월 9일에 투표를 하려다 어제 사전투표를 하고 왔다. 고민 끝에 내키지 않는 후보 중 한 사람을 선택하여 찍고 왔다. 평소 어떤 정치인을 좋아했는지 어떤 정당을 특히 싫어했는지에 대해 스크롤을 내리며 대충은 알고 계셨겠지만, 보이는 선거만큼은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 어제 투표 인증샷이라고 손등에 도장을 14회(15회를 찍는다고 하였으나 하나 덜 찍힌 느낌) 찍어 SNS에 게시했다.

그리고 '너 초등학교 때 이런 거 하다가 존나 죽도록 빠다 맞았지?'라는 댓글이 달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나보다 남들이 먼저 기억할 정도로 꽤 큰 사건이었는데 일기장에도 없어서 잊고 지냈었구나. 처음에는 어른들의 투표 인증을 따라 한다고 손등에 도장을 찍거나 인주를 묻혔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랬나? 라고 생각하고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전혀 다른 이유로 전교생 앞에서 개같이 처맞고 교실로 올라와서 또 처맞았다.

그 상황을 목격했던 다수의 목격자와 내 기억을 교차 검증한 결과는 아래와 같다.

2004년 3월. 합덕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시절로 돌아간다. 1학기 전교 임원선거가 있었다. 전교 반장과 회장을 뽑는 선거였고, 5학년과 6학년이 러닝메이트 형태로 팀을 꾸려 출마하는 방식이었다. 그냥 평범한 유권자였던 나는 회장인지 반장인지 둘 중 하나는 이미 몇 번을 뽑을지 결정했고, 하나는 결정하지 못한 상태로 후보들의 유세를 보고 기표소에 들어갔다.

들어가서도 한참을 고민했었고, 결론은 누구를 찍을지 결정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순수한 의미에서 '미안'을 찍어 내자는 생각에 기표소 도장으로 '미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두 개의 기표소가 있었는데, 내가 들어간 기표소만 줄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한 선생님이 기표소의 천막을 열어보았다. 투표용지에 ''는 다 찍었고, ''의 ''을 찍고 있던 찰나 뒤를 돌아본 나와 그 선생님의 눈이 마주쳤고 '투표를 장난으로 아느냐'며 개처럼 멱살을 잡혀 기표소에서 끌려 나와 투표를 기다리던 수백 명의 학생들 앞에서 엎드려뻗쳐 자세로 개처럼 맞았고 소명의 기회도 없었다. 왜 그랬느냐는 소명의 기회가 있었더라도 체벌이 만연했던 시기라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나는 분명 투표를 장난으로 알지도 않았고,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하여 비밀이 보장되는 투표용지에 아무도 선택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순수한 마음을 표현했을 뿐인데 말이다.

다른 곳에 있었던 당시 5학년 담임선생님은 강당에 들어와 개처럼 맞고 있던 나를 보곤 무슨 일인지 물었고, 나를 때리던 그 선생님은 투표지에 장난을 쳐놨다고 얘기하며 인계했다. 담임 역시 강당에서도 날 걷어찼고 교실에 끌려와서는 때리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 복날 개 패듯이 맞았다. 그래도 담임은 내 말을 들어라도 주겠지 싶어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라고 애원해도 발길질에 책에 온갖 물건이 나에게 다 날아왔다. 두 명의 성인 남성에게 개처럼 처맞았던 초등학교 5학년생인 나는 학교 안에서 하나의 밈처럼 소비되었다. 한동안 왜 거기서 맞았느냐는 질문을 지겹도록 들었고, 사건의 전말을 아무리 말해줘도 내 의견에 동조해주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우리 엄마부터 어릴 적부터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아 상당히 억울했던 사람이기에 부모도 아닌 교사에게 내 발언권을 존중받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다 쳐도 문제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여동생에게 있었을 거다. 수백 명 앞에서 개처럼 맞던 나 때문에 나만큼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이고 내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서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게 분명하며, 같은 학교에 다니던 내가 도움은커녕 삶의 걸림돌이 되었으리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래서 그런지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나와 엮이지 않는 학교로 진학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기행을 일삼으려 드는 나라는 사람의 동생이라는 게 살아가며 마이너스로 작용했긴 했을 테니 두고두고 미안하게 생각된다.

초등학교의 전교 임원선거는 결과보다 선거 절차를 익히고 유권자의식을 함양하는 교육의 목적이 더 크리라 생각된다. 투표로 보여준다는 말이 무엇인가. 득표수와 당선 여부와 같은 결과로 보여준다는 이야기도 되겠지만, 유권자의 뜻을 보여주는 수단이니 그런 관용어를 사용하는 게 아닌가. 찍을 사람 없으면 군소 후보에 투표하거나 무효표라도 내고 오라고 얘기한다. 무효표를 만드는 이유는 다양하더라도 소중한 유권자의 뜻이다. 임원선거에 출마하는 초등학생들이 내놓는 공약이란 행복한 학교를 만들겠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나 학부모의 힘이 없으면 독단적으로는 실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고, 학부모회(자모회) 임원이라면 모를까 전교 임원 어린이가 학교나 교사를 상대로 부조리한 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다. 사실상 인기투표일 뿐인 초등학교 선거에서 나는 투표로 내 뜻을 보여주려다 개처럼 처맞은 너무 성숙한 의식을 가졌던 초등학생이었던 것이다. 체벌도 사라졌고 도태된 남성이라 결혼도 못 하겠지만 만약 내 자녀에게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칭찬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이후 나를 기표소에서 개처럼 끌고 갔던 젊은 선생님은 1년 뒤 6학년 담임이 된다. 생각해보니 지금의 내가 그 나이다. 교사의 자질도 충분하고 좋은 선생님이기에 그분 자체를 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교사 입장에서 충분히 장난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개처럼 맞을 만큼 잘못했는지 나는 그렇다고 치고 졸지에 함께 피해를 본 내 동생은 도무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다시금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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