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강면 강문리'에 해당되는 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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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길었던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연휴는 끝났고 약간의 후유증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연휴 마지막날 막상 집에만 쳐박혀 있긴 뭐하기에 카메라를 들고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지난해부터 비슷한 글 제목으로 명절 연휴때마다 비슷한 글을 써보고 있긴 합니다만, 올해도 비슷하게 컨셉을 잡아 그러한 글을 한번 써 보도록 합니다.



작년 추석 연휴 그리고 올 2월 설날까지.. 여튼 두번을 합덕방죽,이타샤라는 콘텐츠로 우려먹었습니다만 이번엔 조금 다르게 부리포를 다녀왔습니다. 이 근처 지역에 사시면서 조금 나이를 드신 분들이 아니라면 조금은 생소한 지명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여튼 오래전엔 여객선도 드나들었던 작은 항구가 있습니다.



거진 2년만에 다시 다녀왔네요. 딱히 갈 일도 없었고, 차체가 낮아지니 가기 두려웠던 것도 있습니다.



부리포로 가는 길. 강문리 방향으로 쭉 들어갑니다. 길이 끝나는 시점까지 말이죠.



가을 하늘은 높고, 연휴 막바지인 만큼 차도 없습니다. 


그냥 이 길이 끝나는 시점까지 쭉 들어가면 부리포가 나옵니다. 거창하게 이정표는 붙여놨지만, 길이 끝나는 종점에 가서는 사실상 농로를 타고 제방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2년 전에도 역시 비포장이였습니다만, 아직도 비포장 상태로 남아있군요.


하천 주변 환경정비사업으로 인하여 싹 갈아엎었던게 2년 전 당시 부리포의 상황이였습니다만, 그 이후로 크게 달라진것도 없습니다. 단지 농번기인지라 이리저리 추수 관련 작업을 하러 다니시는 아저씨 아주머니들만 종종 지나갈 뿐입니다.



한쪽으로는 광활한 소들평야가 펼쳐져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광활한 아산만 사이로 삽교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강 건너편으로는 쏘나타와 그랜져를 생산하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과 사원아파트등이 보입니다.


바로 아산시 인주면입니다.



오랜만에 찾아간 부리포에는 카크레인이 한대 있네요.


영업용도 아니고 이 지역 식별숫자가 붙은 지역번호판이 달린 구형 라이노입니다. 아무래도 하루 조업으로 잡아온 물고기를 뭍으로 들어 올리는 일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생선비린내가 좀 나는군요.



부리포에서는 바로 서해대교도 보이고, 삽교호방조제를 건너가는 차량들 모습도 보입니다.



2년 전엔 없었는데 작은 조립식 건물도 하나 생겨났군요.


환경감시단사무실, 삽교호자율관리공동체, 삽교호어업계 무려 세군데 간판을 달은 사무실입니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 처럼 느껴지는 당진 동남권에도 어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반대편은 인주 현대차 공장과 사원아파트가 들판 뒤로는 합덕 시내가 보입니다.



강물이 출렁이는 선착장 바로 앞까지 차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사람은 하나 없고, 강물은 출렁이고.. 민물고기 비린내는 바람을 타고 날라오고... 간판이 세개나 붙은 건물 앞에 올란도가 한대 있고 TV소리는 들리는듯 합니다만, 인기척을 듣고 나와보는 사람은 없더군요.



부리포 그리고 삽교천 곡교천 일대는 수산자원보호구역입니다.


그래봐야 영 수질이 좋지는 않지만 건축물, 공작물의 신축, 개축, 증축, 개간, 간척, 토지의 형질변경, 가축의 방목, 흙, 모래, 자갈, 놀 등의 채취, 광물채굴 행위가 금지된 구역이라는군요.



지금 기존의 선착장 옆으로 또 무언가를 만드려나 봅니다. 


아무래도 어선 정박을 위한 장소가 아닐지 싶네요.



사람 하나 없고, 작은 어선들만 있는 부리포는 오늘도 평화롭습니다.


비록 오래 전엔 여객선도 다니고, 대한통운 창고도 있었던 동네입니다만.. 지금은 그냥 어민들이나 찾는 잊혀진 포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더군요.



본 선착장은 지역어업인의 안전한 어선접안을 목적으로 설치한 시설입니다.

낚시 행위 등 무단진입을 금지하며, 임의사용으로 발생하는 안전사고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여튼 그러하답니다. 허가받은 사람들만이 조업이 가능하고, 아무나 와서 임의대로 사용하다가 사고가 날 경우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합니다. 뭐 그래도 정부가 책임져라 한다면 책임 져주겠지만 말이죠.



늦은 오후 부리포.. 차량 사진좀 찍어봅니다.


이타샤 작업을 한지도 어언 15개월이 넘어갑니다. 해놓고 보니 좀 더 자극적이고 화려한 이타샤를 만들기 위해 갖가지 디자인에 대한 연구와 악세사리에 대한 연구를 해 봤습니다만, 다음번엔 무조건 풀랩핑으로 넘어가볼까 합니다.


뭐 보는 사람이 안쓰럽게 느낀다 해서 이타샤라는 이름이 붙은 장르라지만, 저런거 붙이고 다니는게 안쓰럽게 여겨지더라도 단순히 덕지덕지 스티커를 붙인다는 목적보다는 짜임새 있는 데칼튜닝의 일종으로 관심을 유도하고 그렇게 저변을 넓혀가고 싶은 생각입니다.



강가에.. 금방이라도 사이드 브레이크가 풀린다면 물속으로 풍덩 할 것 같은 상황입니다만..


그래도 사진은 계속 찍어봅니다. 사진 말고 남는게 뭐 더 있으려나요. 나름 뒤에서 보면 상당히 역동적인 디자인입니다만, 반대로 앞에서 본다면 뭔가 비대칭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걸 의도하기도 했구요.



텔레포트를 쓰지 못하는 시라이 쿠로코 그리고 수륙양용차로 변신을 하기 전까진 건너지 못할 강.


비린내가 코를 간지럽히고, 비린내가 나니 근처에 있던 파리들 역시나 따뜻한 자동차 본넷트로 올라옵니다. 어쩌다 보니 배경인 은색을 제외한다면 검은색과 주황색 조화로 차를 꾸미는 상황입니다만, 추후 계획을 얘기해 보자면 검은색보단 주황색이 좀 더 늘어날 예정입니다.



아직 돌아다닐 국토는 넓고, 이타샤를 전파해야 할 공간은 많습니다.


기존에 가입해 있던 이타샤 카페의 방향과는 시작부터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얼마 전 자진해서 나오긴 했습니다만, 개점휴업중이던 카페 하나 인수하는 방향으로 또 다른 이타샤 카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잘 이끌어 나가다 보면 좋은 방향으로 시너지가 날테고 대한민국 내에서의 이타샤 문화의 발전과 개체수 증가를 도모할 수 있겠지요.



가까이에 살면서도 2년만에 다시 와 본 부리포.


딱히 볼거리도 느낄거리도 없다 느낀다면 그렇게 느껴지겠지만, 우리 지역의 작은 무언가를 하나하나 알아간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는 즐겁고 행복합니다.



다음번엔 겨울에 한번 더 찾아올까 합니다.


꽁꽁 얼은 강바닥과 조금은 특별한 스파크. 겨울에 다시 부리포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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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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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또 방전이 되었다. 수도없이 방전이 되고 충전도 제대로 되지 않는듯 싶다..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서 얼마전 새로 개통된 70번 국가지원지방도를 한번 쭉 타보고 내경쪽으로 해서 길을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강문리를 거쳐 부리포라는 곳을 가게 되었다.



뭐 이리 집가까운데에 항구가 있나... 했는데 진짜 있었다.


이름은 부리포. 우강면 부장리에 위치해있다. 70년대 후반 방조제로 삽교천이 막히기 전까지는 양곡을 실어나르던 배도 드나들었고, 인천항으로 향하던 여객선도 드나들었던 자리다. 현재는 삽교천변이 공사가 진행중이다보니 약간 어수선한 감이 없지는 않다.



시멘트로 덕지덕지 발라진 항구에 소형 어선 몇척 없는 이곳이지만 한때는 부흥했던 곳이다.


수십년전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이주해온 인구들이 정착하여 지금의 인천이 발전했듯이 인천 이민 1세대들이 떠난 곳이 한진포구와 바로 이 부리포고 수많은 지역사람들이 육로 대신에 비교적 가까운 시간에 인천에 닿을 수 있는 항구를 택했던게 아닐까 싶다.


P.S 한진포구는 아직까지도 관광지로써 그 명성이 자자하다.


인터넷상에서 긁어온 글이기는 하지만, 부리포는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절 먹고살 것 없던 서해안 주민들의 루트 역활을 해주었다. 초창기에 특히 서산 당진지역 사람들이 인천으로 많이 이주를 했지만, 이후 이주해온 전라도사람들의 강한 사투리 억양과 호남향우회등 나름 눈에 띄는 행동으로 인해 비교적 조용히 살던 충청도 이주민에 비해 전라도 이주민들이 더 많이 부각되어온 듯 하다.



그 당시 충남 해안, 특히 당진군과 서산시는 해로를 통한 인천시와의 교통이 원활하고 또한 그 시간 거리(3~4시간)가 비교적 짧았다. 1960~70년대 당진군 한진․부리포(부장리), 서산시 생길포․구도․팔복(대산면)은 인천항을 오가는 선박들이 정박하는 포구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포구에 대한 접근이 용이한 충남도민은 새로운 직업의 기회를 찾아 해로를 통하여 인천시로 이주하는 것이 육로를 통하여 다른 도시로 이주하는 것보다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인천시에 거주하는 충남출신자 중에서 당진군, 서산시, 태안군 출신자가 가장 많은 것이다. 


충남도민은 인천시로의 이주 초기에 대부분 취업의 기회가 많은 중구와 이에 인접한 동구와 남구에 정착하였다. 여기에는 대성목재, 항공유리, 대한중공업(인천제철의 전신), GM대우 등과 같은 대형 제조업체들이 입지하고 있었다. 충남도민은 우선 이러한 제조업체 근처에 집을 얻은 다음 직장을 구하는 방식으로 객지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충남도민의 출발지는 포구에 대한 접근성과 내륙성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1) 당진군․서산시․태안군, (2) 공주시․논산시․금산군 또는 연기군․대전시․천안시, (3) 부여군․서천군․보령시․청양군 또는 홍성군․예산군․아산시. 


여기에서 출발지 ‘(1) 유형’은 해안을 끼고 있는 곳으로 인천시로의 초기 이주에서 주류를 형성하였다. 당진군과 서산시 출신자들은 해상 교통을 이용하여 인천항으로 들어온 다음 중구와 동구를 중심으로 정착하였으며, 그 후 인천시의 성장에 따라 남구(주안 포함)와 남동구로 거주지를 이동하였다. 그 결과 1990년대 당진군 출신자들은 부평구를 제외하면 남구, 남동구, 동구 순으로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거주지 집중률이 가장 높은 순서는 주안동, 송림동, 숭의동, 구월동, 도화동, 용현동, 만수동이었다. 서산시 출신자들은 초기에 중구를 중심으로 정착한 다음 인천시의 성장 방향을 따라 용현동, 송림동, 주안동으로 거주지를 확장하였다. 1990년대 그들은 당진군 출신자들과는 약간 다른 양상으로 남동구, 남구, 부평구 순으로 집중적인 거주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거주지 집중률이 가장 높은 순서는 주안동, 만수동, 구월동, 간석동, 용현동, 부평동, 십정동이었다. 태안군 출신자들은 특이하게도 당진군․서산시 출신자들과 다르게 거주지가 부평구에 가장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의 거주지 집중률이 가장 높은 순서는 부개동, 십정동, 송림동, 청천동, 만수동, 구월동, 부평동으로 배열되었다. 


출발지 ‘(2) 유형’은 충청남도에서 가장 내륙 방면에 위치하고 있는 시․군으로 인천시로의 이주 인구가 ‘(1) 유형’ 다음으로 많다.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공주시․논산시․금산군 출신자들이 ‘(1) 유형’ 출신자들과는 달리 효성동에 가장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천안시․연기군․대전시 출신자들은 산곡동에 가장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출발지가 충청남도 내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해로보다는 육로를 이용하여, 서울시를 거쳐 서울시에 가까운 효성동과 산곡동으로 이주하였다고 추정된다. 1980년대부터 효성동과 산곡동은 공업단지가 대대적으로 조성되어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창출되면서 공주시․논산시․금산군 출신자와 천안시․연기군․대전시 출신자들을 집단적으로 흡인하였던 것이다. 


출발지 ’(3) 유형’은 인천시로 이주한 충남도민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낮은 시․군으로, 예산군을 제외하면 기여도가 지극히 미미하다. 그러는 가운데 ‘(3) 유형’ 출신자들은 서천군과 예산군 출신자를 제외하면 공통적으로 십정동과 부개동을 중심으로 거주지가 집중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특이하게도, 서천군 출신자는 거주지가 청천동에 가장 집중되어 있으며, 예산군 출신자는 거주지가 주안동에 가장 집중되어 있다. 홍성군 출신자와 아산시 출신자는 공통적으로 십정동 다음으로 부개동이 아닌 구월동에 거주지가 가장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집거현상(集居現象)은 ‘동족(同族)’과 ‘동향(同鄕)’이라는 연고(緣故)를 매개로 하는 연쇄이주(連鎖移住: chain migration)에 의한 결과로 추측된다.




물은 똥물이지만 주변으로 섬들도 간간히 보인다. 물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작은 섬들은 사유지로 쓰이는 경우도 있긴 하다만, 지금 항구의 역활은 그냥 삽교천 주변에서 붕어나 낚아 올리는 어선들의 선착장과 외딴 섬에 왔다갔다 하는 수준의 항구밖에 되지 않는다.


한때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들던 항구이다보니 네이버 뉴스캐스트 옛날신문을 통해 몇몇 애피소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좋은일로 기사가 나온건 아니지만 말이다.




동아일보 1931.03.27


부리포를 출발해서 삽교천을 건너 바다로 나간 인천기선회사 소속의 증기선 '삼영환(三榮丸)'이 한진포구 즈음에서 종선 역활을 하는 목선과 충돌해서 목선이 침몰하고 7명이 빠졌으나 6명은 구조되었고, 당시 신평면 운정리에 거주하던 김봉군(33)씨는 사망하였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다.


8년 후, 이 삼영환이라는 배를 보기 위해 십리를 걸어 부리포에 온 아홉살 소아가 있었는데...



1939.08.15 동아일보


합덕 장수남씨의 장남 장영진군과 친구들은 약 10리를 걸어서 범천면(현 우강면)의 부리포에 발동기선을 구경한다며 집을 나섰으나, 발동선을 대는 깊은곳에 들어가 수영을 하다가 실종되었는데.. 다음날 오전에야 공뿌리(공포리)에서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는 내용..


장영진군이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여든살 드신 어르신이 되어계실거라 생각된다...


그리고 일본선적 삼영환은 한참 시간이 흘러 54년에 제주도에서 밀항자 20여명과 밀수품을 싣고 일본으로 향하다 검거되어 한국 정부에 압수가 되었는데... 그 이후로 삼영환이라는 배는 과연 어찌되었는지 알 방도가 없다. 이 배를 추적해보는것도 나름 재미있어 보인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101200329202006&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54-10-12&officeId=00032&pageNo=2&printNo=2667&publishType=00020




여튼 부리포 주변 수문으로 올라왔다. 사람도 없고 물안개만 끼어있을 뿐이다.


돌맹이를 하나 던져보았다. 풍덩하고 빠지는게 물이 상당히 깊은가보다. 1930년대 깨끗했던 물도 아니고 더러운 물에서 수영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만 조심하자...



환경정비한다고 파헤쳐둔 땅으로 내려와서 사진도 한번 찍고.....


여기 꿩도 돌아다니고 별별 야생돌물들이 다 돌아다닌다. 비둘기떼도 그렇고 나름 생명의 보고....



신흥지구 2공구 환경정비사업 결사반대.


무슨 이유일까.. GAKA의 4대강 사업에 포함된 곳은 아니지만 환경정비를 한다며 도로를 포장하고 주변에 논으로 이용되던 땅에 나무를 몇그루 심어두었다. 설마 이런 외딴데에 산책로 만들고 하려는건 아닐테고.. 반대하는 이유가 궁굼하기도 하다.


육상교통이 발전함과 동시에 방조제로 인해 포구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부리포... 한때 번성했던 포구였지만 지금은 일부러 찾아오는이 거의 없는  그곳은 오늘도 역사와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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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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