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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업무일지로 뵙는군요. 특별한 일이 있을때만 작성되는 업무일지입니다.


지난 금요일이네요. 금요일 저녁에 가까워진 시간에 홍성 시내에서 태안 초입의 한 폐차장으로 가는 오더를 배차받았습니다. 뭐 단가도 괜찮았고, 일찌감치 다녀오면 딱히 길이 막힐 일도 없었기에 좋다고 노래를 부르며 갔습니다. 그리고 제게 주어진 차량은 2002년식. 15인승 그레이스였습니다.


인력사무실에서 사용하던 차량인데, 암만 다 썩었어도 15인승이니 중고로도 고가에 거래되고 수출도 무조건 나가는 차량인데 왜 폐차를 하나 싶어 시동을 걸어봤더니 마치 엔진이 붙은것마냥 차가 엄청난 요동을 치더군요.


여튼 그래도 가는데엔 큰 지장이 없다 하니 잘 타고 가 봅니다.



탱크 지나가는 소리가 납니다. 속도도 그냥저냥 올라가고요. 수온도 정상입니다.


뭐 이정도면 소리만 요란하지 가는데 이상은 없겠거니 하고 잘 가던 와중 서산 고북정도 와서 신호를 대기하는데 시동이 꺼져버립니다. 다시 세루모터를 돌려봅니다만 하얀 연기만 내뿜고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ㅈ된 상황이 왔습니다. 수온게이지라도 확 올라가거나 갑작스레 출력이 저하된다면 미리 대비라도 할텐데 이건 너무 갑작스러워서 별다른 대비를 할 수 없더군요.


여튼 딱히 좋은 차를 쓸 필요가 없는 인력사무실에서 육안상으로는 지극히 멀쩡한 승합차를 버린다는건 이유가 있는 일이였습니다. 헤드가스켓과 실린더헤드에 문제가 생겨 오늘내일하는 상황이니 멀쩡하면 몇년을 계속 타도 문제가 없고 중고로 팔고 수출을 보내도 나름 괜찮은 가격을 받을 차를 이렇게 폐차장으로 보내겠지요.

 


일단 차를 밀어서 차선 밖으로 뺍니다.


이 길고 무거운 15인승 그레이스를 밀어서 보도블럭 위로 올려봅니다. 세루모터를 돌리니 매케한 흰 연기만 올라옵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발주자에게 가다가 차가 섰다고 연락을 합니다. 냉각수를 확인해보니 보조통 바닥에 아주 조금 있더군요. 이거 뭐 렉카를 불러서 띄워가던지 해야 할 판인데, 혹시나 싶어 어느정도 열이 식은 뒤 악셀을 열심히 밟아가며 시동을 걸어봅니다.


시동은 아주 힘겹게 걸렸습니다. 진동도 그렇고 차를 처음 받았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크랭크 닿는 소리인지 쇠갈리는 소리가 좀 더 크게 들리더군요.



일단 고북 면소재지에 들어가 편의점에서 생수를 한병 구입했습니다.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은 미지근한 생수를 사와서 약 두모금 마시고 보조통에 일단 부워버리고 출발합니다. 이미 어두컴컴해졌는데 갈길은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가다가 한번 더 시동이 꺼질지 모르니 천천히 갑니다. 탱크 아니 경운기 소리를 내고 매케한 회색 연기를 내뿜어가며 갑니다. 당연스럽게 차도 잘 나가지는 않습니다.



ㅌㅌㅌㅌㅌㅌㅌㅌ 거리면서 진회색 매연을 내뿜어가며 부디 가다가 서지 않기만을 빌고 또 빌며 갑니다. 


영상을 보시고 영상에서 들리는 이런 소리를 듣고 갔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폐차장에 도착했습니다.


후련하네요. 이제 눌리던 잘려서 수출길에 오르던 제 알바는 아닙니다. 폐차장 입구 옆 대기장에 차를 세우고 나갑니다. 홍성에서 태안까지 40km 수준의 거리를 1시간 30분이나 써가면서 달려왔네요. 그래도 다시는 시동이 걸리지 않을 뻔 한 차를 겨우 끌고 와서 탁송비를 받았다는 부분에서 위안을 삼습니다.



시트도 멀쩡하고, 실내도 깔끔하지만, 엔진 헤드가 나가버린 15인승 그레이스는 이제 안녕입니다.


년식도 좋고 실내도 이정도면 준수한 수준인데 물론 이 차로 하여금 고생을 하긴 했지만 조금 아깝긴 하네요. 항상 이런 차를 탈때마다 언급합니다만, 제발 주행하는데 문제가 있느 차는 렉카로 띄워서 눌러버립시다. 물론 렉카가 달고 오는것보다 사람이 가서 던지고 오는게 훨씬 저렴하게 먹힌다고는 합니다만, 탁송기사의 목숨도 여러분의 목숨만큼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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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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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하면서 가장 배기량이 높은 차를 타 본 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폐차장에 가는 상상 이하의 상태를 가진 똥차부터 시작해서 수억원을 호가하는 비싼차들. 벤츠 S클래스 포르쉐 911같은 차량들도 타 보았습니다. 이 업계에 발을 들이셨던 분이 아니라면 '비싼차 원없이 타서 좋겠네' 라는 생각을 가지시겠고 그럴 생각에 이 직업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오히려 이런 비싼차들은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많고 작은 데미지라도 입었다가는 몇달치 일당이 날아가기에 그리 선호하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단가가 평범한 국산차에 비해 좋은것도 아니고요.


여튼 화성 남양에서 죽치고 있는데, 마도에서 일산으로 올라가는 오더가 하나 올라옵니다. 면사무소에서 차주를 만나기로 했는데 뭐 평범한 차량이겠거니 생각하고 면사무소에 왔습니다만.. 삼지창이 보입니다. 마세라티입니다.



마세라티도 그냥 마세라티가 아닙니다. 삼지창 중 가장 빠르다는 그란투리스모입니다.


면사무소에서 차주분을 만나 공장까지 들어간 뒤, 공장에서 일산까지 끌고 갈 차를 인도받습니다. 한국에도 2009년부터 정식수입이 되는 차량입니다만, 타국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 차량인지라 아직 정식번호판 대신 임시번호판이 달려있더군요. 여튼 차고도 매우 낮고, 더군다나 과속방지턱이 넘쳐나는 동네에서 출발하는지라 차량 검수를 꼼꼼히 진행합니다.



SM3 전기차 느낌이 물씬 풍겨오는 그란투리스모의 테일램프.


2007년 제네바모터쇼에서 데뷔한 뒤, 현재까지 자잘한 변화를 거치며 판매중인 차량입니다. 신차 가격은 2억이 넘어가고요, 페라리의 F136 자연흡기 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가 맞물려 4.7초대의 제로백을 자랑합니다. 차구경이 목적이 아니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하는게 목적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앞범퍼 하단에 긁힌곳이 있는지 확인합니다.



낮은 차고 탓에 여기저기 긁히고 깨진곳이 보입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작은 흠집의 위치까지도 상세히 확인하고 찍어줍니다. 그렇게 사진을 여러장 촬영한 뒤 목적지로 향합니다. 그래서 밟았냐구요? 아뇨. 길도 막히고 괜히 밟았다가 일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천천히 갔습니다.



엔진을 공유했던 페라리의 F430과도 유사한 핸들입니다만, 제 눈엔 그냥 에스페로 씨에로 핸들마냥 보이네요.


뭐 여튼 계기판도 죄다 마일로 표시. 온도 역시 화씨로 표시. 네비게이션을 켜고 그냥 천천히 갔습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며 잠시나마 가속을 해본게 사실상 가속의 전부. 그렇게 재미 없게(?) 신경만 곤두세우고 목적지까지 왔습니다.



목적지에 와서도 조그만한 턱에 닿을까봐 길 좋은 뒤로 돌아서 들어왔네요.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원하시듯 막 밟아 조지고 오지도 않았고요. 갑작스레 억만장자가 되지 않는 이상 평생 운전석에 앉아 볼 일도 없는 차를 몰아보았다는 부분은 평생의 이야기거리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같은 일을 한다면 평범한 국산차 타고 신경 덜 쓰고 다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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