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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목격기라고 하기는 애매한 엘란의 동승기를 남겨보기로 합니다.

 

지난 토요일입니다. 엘란을 타고계신 회원분께서 저를 보고싶다고 찾으시기에 연락을 드렸고, 토요일 집 근처에서 뵐 수 있었습니다. 빨간색 엘란을 타고 오셨는데, 그 엘란이 그냥 엘란도 아니고 휠과 서스펜션 그리고 머플러 팁을 제외하면 사실상 올순정 상태로 보존된 차량이였습니다.

 

엘란(ELAN)은 영국의 로터스(LOTUS)에서 생산하던 2인승 로드스터였습니다. 1세대 모델을 거쳐 탄생한 2세대 모델이 만년 적자를 보던 와중 엘란에 대한 상표권과 생산라인을 기아자동차에 매각하여 탄생하게 된 것이 기아의 엘란입니다. 사실 기아자동차는 당시 로터스 엘란의 경쟁모델이던 마쯔다의 MX-5(유노스 로드스터)를 도입하여 라이센스 생산하려는 목적이였지만, 이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엘란의 생산라인을 가져오게 된 것이였습니다.

 

여튼 96년 출시되었으나, 당시 기아자동차에서 손해를 감수하고 가격을 책정했음에도 대형차 수준의 비싼 가격을 자랑하던 엘란은 IMF 이후 기아그룹이 부도를 맞으며 오히려 손해를 보고 판매하던 차량이였던지라 99년 단종되고 맙니다. 총 1055대가 생산되었고 이 중 200여대는 일본에 수출된 차량인지라 대한민국 땅에 판매된 엘란은 천대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실 엘란을 지나가면서만 봤지 가까이에서 보거나 타 본 적은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가까이 마주하게 되었고, 동승까지 하게 된 것이였습니다.

 

빨간색 엘란. 녹색 전국번호판.

 

흰색 전국번호판이 등장한지도 대략 15년 가까이 지나 지금은 보기 귀해진 녹색 전국번호판의 모습도 보입니다.

 

대략 국내에 800여대가 판매되었고, 그 중 여러 사유로 방치되거나 폐차된 차량들도 다수 존재할테니 현재 대한민국 땅에서 살아 돌아다니고 있는 엘란은 절반 수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모로 다시는 대한민국 브랜드에서 이런 자동차를 만들지도 않을것이고 상징성이 강한 차량이기에 그 가치는 시대가 변해도 꾸준히 인정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KIA ELAN

 

날도 좋고. 뚜껑 열고 다니기는 더더욱 좋습니다.

 

조금 더 추워진다면 뭐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처럼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딱히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라면 오픈카의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겠지요. 여러모로 기아차지만 기아차 같아보이지 않는 이 엘란을 처음 가까이에서 본 소감은 지금도 충분히 먹어준다였습니다. 아 물론 범퍼 하나에 100만원이고 국산차인데 영 구하기 힘든 부품과 어지간해서는 엄두도 못내는 수리비를 생각한다면 지금도 충분히 먹어주는 차량이지만, 막상 구입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어디 좋은 직장 다니고 능력 좋으신 분들이 아껴주셔야지 저같은 서민은 가질 수 없습니다.

 

순정 흘림체 레터링과 기아 엠블렘이 붙어있습니다.

 

대부분 도색 혹은 기아마크가 촌스럽다고 떼어버려 제치로 붙어있는 차량이 매우 드뭅니다만, 이 차량은 모두 제치로 부텅있습니다. 지금은 저 레터링조차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여러모로 매우 귀한 레터링과 엠블렘이 모두 공장 출고 제치로 붙어있는 매우 귀한 차량입니다.

 

뭐 복원도 좋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것은 온전한 상태로 보존된 제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엘란은 기아에서 국산화를 하며 기존 양산형 차량의 부품을 대거 사용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저 핸들은 크레도스와 카니발 카렌스 스펙트라 등 그 당시 기아자동차 차종에 고루 적용되던 고급 가죽 에어백 핸들입니다. 계기판은 크레도스의 것을 사용했고요. 기어노브 역시 크레도스 수동변속기 차량에 적용되는 것과 동일합니다. 스위치 역시 당시 기아 범용 스위치를 사용했습니다.

 

마치 요즘 개발되는 군용차에 민수용 차량 부품이 다양하게 활용되는것처럼 말이죠. 여튼 엘란의 순정핸들과 순정 기어노브 그리고 오디오는 매우 보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심심할때마다 엔카에 들어가 엘란 중고매물을 많이 보았지만, 가끔 순정 에어백 핸들이 장착된 경우는 볼 수 있었어도 순정 오디오가 장착되었던 차량은 단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 말이죠.

 

엘란을 타고 차주분과 함께 달려봅니다.

 

슈퍼카처럼 미친듯이 튀어나가지는 않습니다만, 슈퍼카에 준하는 감성을 자랑합니다. 속도를 올리면 올릴수록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직접 운행해보지는 않았지만, 차주분은 슈퍼카에 준하는 핸들링이라 하시더군요. 아 그렇습니다. 95년 출시된 기아자동차의 중형 승용차인 크레도스도 개발과정에서 로터스에 승차감과 핸들링에 대해 외주를 줘 나름 동급 대비 우수한 승차감과 핸들링 능력을 선사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우수한 핸들링 감각을 선사하겠죠.

 

 

볼트게이지와 오일 압력 게이지 그리고 아날로그 시계의 모습이 보입니다.

 

비상등 스위치는 구형 세피아용 부품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어릴적 패밀리카가 구형 세피아였던지라 매우 익숙하게 보이네요. 기아에서 국산화를 거치며 눈에 보이는 여러 부분이 국산 부품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순정 1din CDP 오디오입니다.

 

고사양 트림인 하이팩 차량인지라 CDP 오디오가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뭐 그렇지 않은 차량은 일반적인 카세트 테이프가 들어가는 오디오가 적용되었지요. 당시만 하더라도 CDP는 고급 옵션에 속했습니다. 뭐 지금은 블루투스로 노래를 듣는게 가장 대중화된 음악 감상 방법이지만 말이죠. 당시 대부분의 기아차가 그렇듯이 알파인제 데크입니다.

 

조수석 대시보드에 붙어있던 엘란 뱃지의 모습도 보입니다.

 

금장 기아로고와 엘란 레터링. 역시나 엘란 중고매물을 보면 대신 다른것이 붙어있곤 합니다만, 이것 역시 순정이라고 합니다. 여러모로 매우 귀한 순정상태의 엘란입니다. 뭐 순정이 아닌 서스펜션은 순정을 보유중이셨고, 순정휠은 전 주인이 보유하고 있던 시기에 엿장수가 훔쳐가서 결국 사라졌다고 합니다.

 

다들 로터스 엠블렘을 붙이고 다니니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엘란 하이팩용 엠블렘

 

초기형의 경우 기아마크가 붙은 차량들도 있었답니다만, 마치 스포츠팀 로고같이 생긴 하이팩용 엠블렘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사제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기아 정품이 맞습니다.

 

주행을 마치고 가까운 공원에 도착하니 지나가던 어르신께서 유심히 보고 가십니다.

 

분명 기아차인데 기아에서 이런 차를 만들었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수백대 남짓 남아있는 차량인지라 어딜 가나 시선이 집중됩니다. 관심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한대 구입해보시는걸 추천합니다. 다만 관리가 매우 어렵고 어지간히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것이 문제죠.

 

트렁크도 열어봅니다. 생각보다 엘란의 트렁크는 넓었습니다.

 

골프백 하나정도 들어가는 수준의 공간입니다. 킥보드 하나도 쉽게 들어갈 수준이고요. 작은 체격의 로드스터가 트렁크가 커봐야 얼마나 크겠나 싶었습니다만, 예상 외로 큰 공간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워셔액 보조통도 협소한 엔진룸 대신 트렁크에 존재하네요.

 

나름대로 트렁크 마감도 꼼꼼히 신경을 쓴 모양입니다.

 

트렁크 경첩을 고정하는 볼트에서도 빛이 나고 있습니다.

 

하이팩 차량이라 순정 가죽시트가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사제처럼 보이지만 순정입니다. 특유의 엘란 레터링의 모습도 보이고요 바디컬러와 동일한 빨간색이 포인트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차량은 직물시트가 적용되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 좁은 공간으로도 시트 뒷편으로 우퍼박스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이런 자잘한 부분까지도 가죽으로 마감을 했고, 엘란 레터링을 각인했습니다.

 

엔진룸을 열어봅니다. 기아자동차에서 자체개발한 1.8L T8D 엔진의 모습이 보이네요.

 

대다수가 흡기라인을 개조하여 순정 흡기라인이 그대로 살아있는 차량은 매우 보기 드물다고 합니다. 순정 흡기시스템이 그대로 살아있는 매우 귀한 차량이라는 이야기겠죠. 뭐 크레도스와 동일한 그 엔진 그대로 쓰지만, 출력은 훨씬 높습니다. 지금이라면 뭐 그저 그런 성능으로 느껴지겠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느껴질법한 최고출력 151마력과 최대 토크 19.0kg*m를 자랑합니다.

 

딱히 손을 대지 않은 차량인지라 엔진룸 내부 스티커까지 모두 살아있습니다.

 

당시 공인연비는 11.8km/l. 물론 지금 기준으로 측정한다면 8~9km/l 수준밖에 나오지 않겠죠. 엔진 조정과 관련된 안내문과 배출가스 관련 부품 보증기간에 대한 설명이 존재합니다.

 

 

냉각수 보조통 캡 역시 순정이라고 하네요.

 

대부분 순정을 구할 수 없어 다른 차량용 캡을 구해다 끼운다는데, 이 차량은 출고 당시부터 제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따로 냉각수가 배출되는 구멍이 없이 캡에서 배출된다고 하네요.

 

차대번호는 1033번입니다. 1055대가 생산되었던 엘란 중 끝물 모델이라 보면 되겠죠.

 

원부상 99년 10월에 제작되어 등록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아자동차주식회사는 결국 현대자동차에 합병되었고, 한동안 개성있고 실험적인 자동차를 만들어내던 기아자동차는 그저 현대의 아류로 특색없는 자동차만 만들던 브랜드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 후반부터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여 디자인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지금은 디자인만 놓고 본다면 현대보다 우수한 평가를 받는 모델들도 많습니다만, 엘란이 생산된 이 시기 이후 현대의 손에 들어간 기아차는 한동안 정말 암울했습니다.

 

다시 엘란을 타고 이동합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사이드미러는 수입이였을까요? 한글로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대신에 'Objects in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가 적혀있네요. 엘란뽕이 차오릅니다만, 애석하게도 유지를 할 수 없으니 살 수 없습니다. 뭐 로또 맞으면 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지하주차장에 도착하여 내리려 하니 룸미러에서 등이 켜지네요.

 

뭐 일부 오픈카가 이런 구조의 룸미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만, 여러모로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엘란 차주님과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습니다.

 

다음에도 엘란으로 뵐 수 있을지, 고민끝에 구입하시게 된 새 차량으로 뵐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여러모로 저와 올드카에 대한 철학이 어느정도 일맥상통하셔서 좋았습니다. 스토리가 있는 차를 좋아하는것도 그렇고요. 어짜피 오래된 자동차인데 조금 낡아보이면 뭐 어떻습니까. 무조건 새걸로 바꾼다고 능사는 아니지요. 당연하게도 빈티지 튜닝카들은 말 할 가치도 없고요. 좋은 주인을 만난 엘란이 앞으로도 순정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며 오래오래 살아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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