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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첫번째 금요일에 굉장히 바쁘게 지냈습니다. 


아침잠이 없어서 다섯시부터 운동하는 사람들처럼 동네를 돌고, 동틀녘의 시원한 공기를 맛보는걸로 시작해서 이전에 입원해있던 청량리의 성바오로병원에 외래진료때문에 들렸다가 의무기록지 사본 29장을 복사하여 재빨리 대전으로 내려왔습니다. 보완서류를 가지고 2시 20분까지 지방병무청 민원실로 오라고 해서 괜히 촉박했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바쁜 하루였지요.


병무청에 가는 방법이나 주변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전글의 링크를 걸어두는것으로 대체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제가 어떠한 병명때문에 어떤 판정을 받고 병무청을 다시 찾았는지도 잘 나와있으니 그 배경이 궁굼하시다면 그냥 아래 글들을 참조해주세요.




더위속에서 다시 찾아간 대전충남지방병무청 징병검사장은 그야말로 찜통이였습니다. DSLR을 들고가지 않아서 적절히 이전에 다녀왔던 사진을 재탕해먹게 되었네요. 8월 3일 오후타임에 신검을 받으러 온 무리들이 나라사랑카드를 만드는 작업을 저 멀리에서 하고있었고, 민원실은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들로 가득했습니다.


번호표를 뽑는 기계도 꺼져있다보니 지난번 신검때 처음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던 민원실에 서류를 보완해서 다시 오게되었다고 말을 하고 민원실 창구에 신분증과 나라사랑카드를 건넵니다.



잠시 대기실에 가있으라는 오더를 받고 대기실에서 대기한지 몇분이 흐른걸까요.. 금방 저랑 체중으로 재검을 받으러 온 것 같은 사람 한명을 같이 부릅니다. 각자 재검을 받는 사유에 따라 다른색깔의 부령 몇호라고 써있는 종이랑 재신체검사 순서도라는 저 종이를 아까 냈던 신분증과 나라사랑카드와 함께 저에게 주고 자세히 설명해줍니다.


지난번에 병무청 신검장에 왔을 때 군의관을 만났던 3층으로 다시 가면 됩니다.


3층 2번창구에 있는 정형외과에 가서 진단서등을 제출하고 

9번창구의 수석의사에게 승인을 얻은 뒤 

0번창구의 적성분류관11번 창구의 징병보좌관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병역처분등위를 알려주는 12번창구의 징병관을 차례로 만나면 됩니다. 



정형외과 창구에는 이런저런 사유로 인해 재검을 받는 사람들의 대기가 세명정도 있었습니다. 


살짝 살펴보니 사유와 병명 모두 다양하더군요. 다들 어떤 병으로 재검을 받는지에 대한 병사용진단서는 손에 필수로 들려있고 그러한 병을 입증할 CD같은 영상자료까지 하나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 제 차례가 오게되고.. 군의관님은 자료를 검토하고 필요에 의해 직접 병무청에서 2층에 있는 x-ray나 CT같은 영상장비를 동원해서 문제가 되는 부위의 촬영을 해오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는데, 제 앞에서 대기를 하던 사람도 그러더니 저도 역시나 엑스레이를 내려가서 찍어오라덥니다.


그래서 오전에 병원 외래가서 찍었던 자세로 엑스레이를 촬영해서 올라옵니다. 역시나 대기자가 많다보니 좀 기다리게 되더군요.. 병사용진단서를 토대로 안쪽으로 움직이기가 힘든 한쪽 다리를 누워서 확인한 뒤에 MRI와 방금 전 2층에서 찍고 올라온 x-ray 사진을 놓고 비교를 합니다. 



지난번 의무기록지 사본을 가져오라고 했던 이유중 하나인 화농성 골수염에 대한 자료를 MRI에서 찾을 수 없다고 했던데에 대해서 병무청에 오기 전 외래진료를 갔을때 주치의선생님한테 확실히 어떤 자료를 보면 된다고 들어오기까지 했습니다. MRI 323장중 96번을 보면 뭐 물이 차고 근육이 붓고 어쩌고 설명을 해주시는데 그 자료를 보고 또 방금 찍어온 x-ray 자료와 의무기록지 사본을 이리저리 확인해본 결과 화농성 골수염에 대해서 입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듣고 온 이야기와 판정을 요약해보자면


지금 상태로는 4급판정을 내릴 수 있는데, 병 초기에 MRI상에서의 고관절에 비해서 지금은 뼈가 녹았다고(?) 하더군요. 이걸 조금 더 지켜보고 경과에 따라서 3개월후에 4급을 주던지 5급을 주던지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튼 이번에는 7급 재검판정을 받았습니다.



현역판정과는 멀어졌고 명확한 결과발표는 3개월 후인 11월로 미루어졌습니다. 


지금도 많이 좋아졌지만 그때쯤가서는 더 좋아진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이번에 한번 또 갔는데, 교통비랑 식대비로 4만원정도의 돈이 또 나오더군요. 교통비 몇번 받는것도 좋지만 번거롭게 왔다갔다 하는것도 정말 지겨우니 다음번엔 제발 어떻게든 결말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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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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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고와 표현"과목의 과제를 위해 작성된 글입니다. 몇회에 걸쳐 서론 본론 결론을 도출해내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해오다가 최종적인 작품을 만드는것이였는데, 나름 좋은작품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블로그에 포스팅으로 남겨놓습니다. 


지난날, 내게는 생전 들어도 보지도 못했던 병이 찾아왔다.

누가 봐도 멀쩡하고 지극히 정상적이던 내가. 자라면서 큰 병치레는 거치지 않았던 내가. 의료보험도 적용되지 않는 검사를 의학용어까지 생소해하지 않아하면서 받는 사람이 되어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부터 단순히 근육이 뭉친 듯 했던 통증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고 걷기조차 고통 때문에 못하는 상태까지 이름모를 병은 악화되었었다. 그렇게 병원으로 오게 된 나는 그저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큰 일이다보니 그냥 병명도 모른채 진통제에만 의존하며 병상에 누워서 다들 개강파티와 환영회로 즐거워하고 있을 시점에도 병원 티비만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에 간지 사흘 뒤에 예약이 밀려있는 이 병원 대신에 의정부까지 엠뷸런스를 타고 원정을 나가 암 검사까지 마친 뒤에야 병명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본격적인 치료에 임하게 되었다. 그렇게 입원해서 다른 환자들이 퇴원하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며 한달여의 기간동안 치료에 임하게 되었고, 빠른 호전증세를 보여 지금의 모습까지 오게 되었다. 물론 아직 다리를 사용하는 것이 이전처럼 아무런 무리가 없고 편하지는 않지만, 재활치료 경과도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7월 안에는 재활치료도 뗄 수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긴 터널의 끝이 보이고 있긴 하지만 불과 병원에서 학사경고를 면하기 위해서 퇴원했을 시점만해도 나는 끝이 없는 어둠속을 헤메는 미아같은 존재였다.

 

즐거운 병원??

 

살면서 겪어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고통은 그래도 이겨냈다. 하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왔던 나는 그렇다고 병이 다 나은 상태도 아니였다. 그냥 좀 더 병원에 있었어야 했는데 학사경고가 무섭다며 담당 의사선생님께 퇴원좀 시켜달라고 말했던 단지 학교가 가고싶었던 거동이 불편한 환자였을 뿐이였다. 그렇게 기대와 환상을 가지고 한달여의 공백을 깬 뒤에 돌아간 학교에 대한 환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해 깨지고 말았다. 대학생활은 일주일밖에 못해보고 시간이 멈춘 듯이 시간개념도 사라지고 그동안의 생활패턴도 모두 잃고 병원 한구석에 쳐박혀있던 내가 기대하는 것은 그냥 이상적인 상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단 무엇보다도 중간고사는 바로 앞에 있었지만 오리엔테이션만 들은 과목을 비롯해서 내가 배운것도 거의 없었을뿐더러 동기들은 그동안 많은 과제를 수행하고 MT를 비롯한 많은 행사를 거치며 많이 친해져있었다. 나는 목발을 짚은채로 열심히 강의실과 건물을 옮겨다니고, 졸긴 했어도 열심히 수업을 듣는 정보통신공학과 12학번의 그나마 존재감은 잊혀지지 않았던 어느 일원이였고 다들 보기에도 조금씩 적응해나가려는 다리는 좀 아픈 친구였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러한 모습과는 달리 속에서는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뭐가 뭔지 모른다는 자괴감에 휩싸여서 혼자 고뇌하고 혼자 괜한 상상을 해오곤 했다. 그러한 상상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휴학충동을 비롯한 지금 생각해보면 셀 수 없는 많은 충동을 느끼고 살아왔다. 남들에 비해 한달 뒤쳐진. 그러니까 다른 동기들은 4월의 학생이고, 나 혼자만 3월에 정체되어있는듯한 느낌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혼자 마음속으로 고뇌하고 그냥 내 자신이 싫었다. 아픈것도 물론이요. 학교도 모든 것도 다 원망스러웠다. 이러한 현실을 벗어날 방법은 기약없는 완치뿐이 없었고, 지금 당장이야 터널의 끝이 보이는 시점이라지만 당시에 나는 그냥 기약없는 완치를 포기하고 될대로 살으라는 생각도 하곤 했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 대한 환상만 가득했던 환자에서 삶의 의욕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혼란스럽게 살고있었다. 나 혼자만 이렇게 속으로 고뇌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는것도 아니다. 아마도 삶에서 의욕이란 찾아볼 수 없는 정신상태 덗분에 재활을 비롯해서 치료 전반에 슬럼프가 잠깐 찾아오기도 했고 주변사람들까지도 힘들게 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속에서 누가 보던 말던 블로그나 페이스북 그리고 혼자 지나가는 말로 아니면 내가 병원에 있을때부터 간간히 근황을 물어오는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카톡으로나마 신세한탄을 하고 지내왔다. 그렇게 자신을 한탄하며 카타르시스를 분출하는 것으로 더 악화될 수 있었던 정신적인 방황은 막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큰 진전이 없던 그날도 마찬가지로 신세한탄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한 나를 본 명언을 좋아하고, 고등학교때도 칠판에 명언을 적어놓던(다들 저게 뭐냐면서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친구가 페이스북에 댓글을 달고 갔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나를 흔히 말하는 멘붕상태에서 어느정도 빠져나올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해주었다.

 

초저녁 병원복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지금의 아픔은 이후 큰 자산이 될 것이다.

 

누가 한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는 우연히 듣게된 명언을 계기로 먼 훗날 지금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그를 이겨내고 회복하려는 노력등이 먼 훗날 큰 자산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투자라는 생각과 함께 작은 희망을 가지고 조금이나마 심리적 압박감을 덜을 수 있었다. 지금은 고통이지만 나중에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그날을 생각하며 불합리하고 정말 절망과도 같았던 나 혼자만의 자괴감을 희망을 가지고 떨쳐낼 수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현재로써 말하자면 정신적인 고통은 거의 다 덜어냈고, 육체적인 고통도 많이 덜어내서 지금은 그 당시에 비한다면 정말 황송할만한 상태까지 오게 되었다. 긍정의 힘이라고 했던가.. 워낙에 극단적인 사고를 좋아하고 평소에도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간간히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사고가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현실을 극복해나가려 노력하다보니 나도 차츰 바뀌게 되었고, 조금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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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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