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 나는 도태되었고 실추될 명예와 이미지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내 치부를 스스로 밝히는 사람이다. 04년 당시 있었던 일이나 어제 달렸던 댓글이 타인이 보기엔 기분 나쁘게 보였으리라 생각할지 몰라도 아직도 내가 수백 명 앞에서 개망신을 당해가며 혼날 이유는 없었다고 생각하기에 긴 글을 적어본다.

3월 9일에 투표를 하려다 어제 사전투표를 하고 왔다. 고민 끝에 내키지 않는 후보 중 한 사람을 선택하여 찍고 왔다. 평소 어떤 정치인을 좋아했는지 어떤 정당을 특히 싫어했는지에 대해 스크롤을 내리며 대충은 알고 계셨겠지만, 보이는 선거만큼은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 어제 투표 인증샷이라고 손등에 도장을 14회(15회를 찍는다고 하였으나 하나 덜 찍힌 느낌) 찍어 SNS에 게시했다.

그리고 '너 초등학교 때 이런 거 하다가 존나 죽도록 빠다 맞았지?'라는 댓글이 달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나보다 남들이 먼저 기억할 정도로 꽤 큰 사건이었는데 일기장에도 없어서 잊고 지냈었구나. 처음에는 어른들의 투표 인증을 따라 한다고 손등에 도장을 찍거나 인주를 묻혔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랬나? 라고 생각하고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전혀 다른 이유로 전교생 앞에서 개같이 처맞고 교실로 올라와서 또 처맞았다.

그 상황을 목격했던 다수의 목격자와 내 기억을 교차 검증한 결과는 아래와 같다.

2004년 3월. 합덕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시절로 돌아간다. 1학기 전교 임원선거가 있었다. 전교 반장과 회장을 뽑는 선거였고, 5학년과 6학년이 러닝메이트 형태로 팀을 꾸려 출마하는 방식이었다. 그냥 평범한 유권자였던 나는 회장인지 반장인지 둘 중 하나는 이미 몇 번을 뽑을지 결정했고, 하나는 결정하지 못한 상태로 후보들의 유세를 보고 기표소에 들어갔다.

들어가서도 한참을 고민했었고, 결론은 누구를 찍을지 결정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순수한 의미에서 '미안'을 찍어 내자는 생각에 기표소 도장으로 '미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두 개의 기표소가 있었는데, 내가 들어간 기표소만 줄이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한 선생님이 기표소의 천막을 열어보았다. 투표용지에 ''는 다 찍었고, ''의 ''을 찍고 있던 찰나 뒤를 돌아본 나와 그 선생님의 눈이 마주쳤고 '투표를 장난으로 아느냐'며 개처럼 멱살을 잡혀 기표소에서 끌려 나와 투표를 기다리던 수백 명의 학생들 앞에서 엎드려뻗쳐 자세로 개처럼 맞았고 소명의 기회도 없었다. 왜 그랬느냐는 소명의 기회가 있었더라도 체벌이 만연했던 시기라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나는 분명 투표를 장난으로 알지도 않았고,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하여 비밀이 보장되는 투표용지에 아무도 선택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순수한 마음을 표현했을 뿐인데 말이다.

다른 곳에 있었던 당시 5학년 담임선생님은 강당에 들어와 개처럼 맞고 있던 나를 보곤 무슨 일인지 물었고, 나를 때리던 그 선생님은 투표지에 장난을 쳐놨다고 얘기하며 인계했다. 담임 역시 강당에서도 날 걷어찼고 교실에 끌려와서는 때리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 복날 개 패듯이 맞았다. 그래도 담임은 내 말을 들어라도 주겠지 싶어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라고 애원해도 발길질에 책에 온갖 물건이 나에게 다 날아왔다. 두 명의 성인 남성에게 개처럼 처맞았던 초등학교 5학년생인 나는 학교 안에서 하나의 밈처럼 소비되었다. 한동안 왜 거기서 맞았느냐는 질문을 지겹도록 들었고, 사건의 전말을 아무리 말해줘도 내 의견에 동조해주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우리 엄마부터 어릴 적부터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아 상당히 억울했던 사람이기에 부모도 아닌 교사에게 내 발언권을 존중받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다 쳐도 문제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여동생에게 있었을 거다. 수백 명 앞에서 개처럼 맞던 나 때문에 나만큼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이고 내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서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게 분명하며, 같은 학교에 다니던 내가 도움은커녕 삶의 걸림돌이 되었으리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래서 그런지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나와 엮이지 않는 학교로 진학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기행을 일삼으려 드는 나라는 사람의 동생이라는 게 살아가며 마이너스로 작용했긴 했을 테니 두고두고 미안하게 생각된다.

초등학교의 전교 임원선거는 결과보다 선거 절차를 익히고 유권자의식을 함양하는 교육의 목적이 더 크리라 생각된다. 투표로 보여준다는 말이 무엇인가. 득표수와 당선 여부와 같은 결과로 보여준다는 이야기도 되겠지만, 유권자의 뜻을 보여주는 수단이니 그런 관용어를 사용하는 게 아닌가. 찍을 사람 없으면 군소 후보에 투표하거나 무효표라도 내고 오라고 얘기한다. 무효표를 만드는 이유는 다양하더라도 소중한 유권자의 뜻이다. 임원선거에 출마하는 초등학생들이 내놓는 공약이란 행복한 학교를 만들겠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나 학부모의 힘이 없으면 독단적으로는 실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고, 학부모회(자모회) 임원이라면 모를까 전교 임원 어린이가 학교나 교사를 상대로 부조리한 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다. 사실상 인기투표일 뿐인 초등학교 선거에서 나는 투표로 내 뜻을 보여주려다 개처럼 처맞은 너무 성숙한 의식을 가졌던 초등학생이었던 것이다. 체벌도 사라졌고 도태된 남성이라 결혼도 못 하겠지만 만약 내 자녀에게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칭찬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이후 나를 기표소에서 개처럼 끌고 갔던 젊은 선생님은 1년 뒤 6학년 담임이 된다. 생각해보니 지금의 내가 그 나이다. 교사의 자질도 충분하고 좋은 선생님이기에 그분 자체를 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교사 입장에서 충분히 장난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개처럼 맞을 만큼 잘못했는지 나는 그렇다고 치고 졸지에 함께 피해를 본 내 동생은 도무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다시금 묻고 싶어진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티스도리

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
반응형


티스도리닷컴 새 콘텐츠 초딩일기는...


초등학교 재학 당시 작성했었던 일기장을 펼쳐 당시 있었던 일을 회상하고 여러분께 공유하자는 취지에서 공개하는 콘텐츠입니다. 좋은일도, 그렇지 않았던 일도 있었겠지만 한 시대를 살아가던 평범한 어린이의 일기장을 본다는 마음으로 재미나게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기장은 무작위로 공개됩니다.


오늘은 2005년 4월 7일에 있었던 이야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재학 당시의 일기입니다. 폭력 강점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사실상 강점기라기보다는 당시 다니던 공부방의 실태를 적어놓은 일기에 가깝습니다. 선생님께서 봐주길 바라는 마음에 쓴 일기인데, 그 이후 며칠 일기장 검사 없이 그냥 다시 돌려주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여튼 이 공부방을 3월 초에 다니기 시작했었는데, 대략 한달만에 이런류의 일기를 썼으니 대략 지옥같은 생활을 했다고 보면 되겠죠. 이 공부방은 7월까지 다닌 뒤 그만 두었습니다만, 매우 악몽같던 시간이였습니다.


여튼 악몽같던 그 시기가 떠오르네요. 함께 보고 마저 얘기 드리겠습니다.



제목 : 폭력 강점기


나는 그곳이 싫다.

잘나지도 않고 욕, 협박, 야한말만 하는 작은 공부방이 싫다.

사소한일, 관계없는 일로 때리니까도, 억울하게 누명씌우기, 애들에게 먹을거 빼앗기에다, 별 고문, 또 각목 굵기만한 빗자루(나무)로 머리를 목탁소리가 나게 탁탁 두드리고 협박을 전문으로 한다.

오늘도 한명이 협박을 당했고 (학교)선생님들 욕은 무진장 한다.

교장선생님한테는 돈 밝히는 [욕은 뺌], 또 옆에옆에 3반 선생님한테는 엉뚱한거 잘 내주는 [욕은 뺌]

또 5-2 선생님한테는 정신병원 갈 [욕은 뺌] 같은 심각한 말만 하고, 19세 미만은 못들어야 할 야한 이야기만 한다. 이 사건에 관하면 방구아저씨의 이장역할과 딱 OK이다. 

누가 나와 이야기를 하여서 내 머리에 이 기억을 아무도 모르게 지워주었으면 간절히 부탁한다.


여튼 두서 없는 내용이지만 일기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당시 다니게 된 공부방은 작은 규모였습니다만, 그 당시 초등학교 4학년생과 3학년생 아들을 둔 학부모가 운영하던 공간이였습니다. 물론 두 아들들의 공부를 매일같이 가르치면서 겸사겸사 다른 초등학생들까지 가르키던 무허가 공부방이였는데, 학교 끝나고 가서 오후 7시즈음까지 꽤 오랜시간 공부를 시켰습니다.


아 물론 공부를 오래 한다고 성적이 오르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못해도 80점대 중후반을 유지하던 시험 평균점수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강사나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호칭이 아까운 그 여자의 자식들 역시 매일같이 저녁을 먹고 잠시 TV를 보는 시간을 제외하곤 사실상 억압되고 기본적인 욕구조차 통제받는 삶을 살았는데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학교를 간 것 같지는 않고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네요. 관심도 없지만, 집에서 조금 덜한 수준의 통제를 받던 저 역시 나이 다 쳐먹고 삐뚤어져서 씹덕차나 타는데 말이죠.


여튼 이 공부방은 그 여자의 두 아들은 책상에서, 그 외 학생들은 좌식 탁자에서 우등생평가와 해법수학류의 문제집을 풀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개인별로 혹은 같은 학년이 있는 경우 같이 지도를 한 뒤 이후 수많은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수업이 이루어졌던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수업 외에도 문제를 풀던 도중 일기 내용에 적힌 학교 교사에 대한 욕이나 학생들에게 협박이나 누명을 씌우고 음담패설을 하는 등 전혀 교육적이지 못한 행동들도 다수 발견했습니다. 물론 자기 아들들이 문제를 잘 풀지 못하거나 딴짓을 하면 대놓고 다른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혼내고 때리는 등 자존감을 낮추는 행위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제가 연필깍이를 세게 눌러 사용해서 망가졌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잘 돌아가던 연필깎이를 집 벽에 집어던져서 부셔놓고 새거 이자까지 붙여서 내놓으라는 얘기를 진심을 담아 하던 사람입니다. 물론 어른이라면 강력히 항의를 하고 끝날 일이겠지만, 엄마가 무서워서 집에 제대로 얘기도 못한다는 약점을 잡고 어린아이를 심리적으로 꽤나 잔혹하게 가지고 놀았습니다.


이 외에도 대략 4개월의 시간동안 엄마가 무서워 오히려 본인들이 혼날까봐 집에 제대로 얘기를 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잡아 동생과 저를 꽤나 많이 괴롭혔습니다. 여러모로 예상치 못한 스트레스가 늘어 성적은 성적대로 떨어졌고, 심리상태는 심리상태대로 나빠졌습니다. 결국 공부를 하는 시간이 길다고 성적이 오르는게 아녔다보니 여름에 이 공부방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만, 그 이후로는 근처도 지나다니지 않았습니다.


하다하다 그 여자가 자식들을 학대한다고 이후 SBS에서 방영하게 된 긴급출동 SOS 24라는 프로그램에 아동을 학대하는 공부방이 있다고 제보를 해 볼 생각까지 했었으니 말이죠. 물론 지금처럼 머리가 컸으면 진작 경찰이던 어느 기관이던 쫒아가서 있었던 일을 다 얘기하고 권리를 찾았겠지만 초등학생의 사고 수준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발 누군가가 이 기억을 지워주었으면 좋겠다는 글로 일기를 마쳤습니다만, 결국 아무도 이 기억을 지워주지 못했습니다. 악몽과도 같은 기억도 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만, 가뜩이나 힘든 세상 더 힘들게 만들어 주네요. 그렇습니다 잊고싶습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티스도리

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