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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탐방기의 번외편으로 재정지원 제한대학(일명 부실대학) 탐방기를 준비했습니다.



번외 탐방기의 첫 타자는 서남대학교 아산캠퍼스. 뭐 이래저래 얘기들은 많이 합니다만, 인터넷상에서 볼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학교들 위주로 돌아다녀보려 합니다.


매년 교육부에서 발표하는 '정부재정지원 제한대학'은 여러분이 흔히 '부실대학'이라 부르는 그 명부입니다. 대학 구조개혁 정책에 따라 여러 수치를 기반으로 전국의 모든 대학을 평가한 뒤, 영 좋지 못한 성적을 내고 개선의 여지가 없는 대학에 국가장학금과 학자금 대출을 제한하고 정부의 재정지원을 중단하며 나중엔 폐교심의대상으로 퇴출을 시키는 그러한 제도입니다. 


물론 이 명부에 들어간 대학들은 정원을 감축하고, 취업률이 낮은 학과의 통폐합 그리고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빠져나오긴 합니다만, 서남대는 지금까지 이 발표에서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썩을대로 썩어빠진 설립자측의 구 이사진을 대신할 관선이사가 파견되었고, 사실상 이 학교가 이리 막장임에도 지금껏 존재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된 의예과가 폐과되지 않는 한 희망은 있다고 봅니다.



외곽도로를 타고 지나가면서도 서남대학교 아산캠퍼스 이정표가 있는걸 보고 궁굼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산시내 혹은 시내를 우회하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가는게 아니라, 예산군 대술면을 거쳐 서남대학교 아산캠퍼스가 소재한 아산시 송악면으로 고갯길을 타고 넘어갔습니다.


의외로 송악면 소재지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다만, 아산시 중심지(온양)에서는 버스로 오나 택시로 오나 꽤나 먼거리입니다.

 


송악면 소재지 끝자락에 '아산서남대학교'라는 이정표가 존재합니다.


물론 그 옆으로 마을과 농장을 알리는 주춧돌과 여러 이정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만, 가장 크고 눈에 띄는건 서남대학교 방향이라 알리는 이정표가 아닐까 싶네요. 


2002년 8월에 개교한 학교인데, 학교로 진입하기 위해 필히 거쳐야 하는 다리는 오래전 새마을운동 시절에 마을의 관문으로 놓아둔 좁은 다리입니다. 또 다른 교량이 있습니다만, 이보다 협소하고 붕괴위험이 있어 차량통행을 제한한다는 표지판을 세워둔 상황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높은 건물이 서남대학교 아산캠퍼스 건물입니다.


온전하게 지어진 건물이 두 동. 그리고 짓다 말은 건물이 우측편에 보입니다.



평범한 송악시내. 당진 송악은 급격한 발전으로 읍으로 승격. 

아산 송악은 그저 시골동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대학가 상권 그런것도 없습니다. 지난번 폐교탐방 시리즈에서 다루었던 한민학교가 소재한 논산시 연산면 소재지를 보는 느낌이네요. 대학이 산 중턱에 있다는 사실도 그렇고, 대학 진입로와 마을 진입로를 공유하고 있다는 공통분모도 보입니다.



좁고 낡은 교량을 건너오면 나름 잘 닦여진 편도 1.5차선 도로가 보입니다.


이걸 2차선이라 보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1차선으로 보기엔 너무 넓은데, 캠퍼스 조성 당시에 닦아둔 도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 도로 재포장은 단 한번도 하지 않은걸로 보이는군요. 


드문드문 도로 중앙에 가로수도 심어두었고, 마치 잘 조성해둔 관광단지에 온 기분도 듭니다.



시내버스(농어촌버스)는 일 5회 정차합니다.


이 직선도로의 시작지점에만 버스정류장이 있음을 알리고 있지, 다음 지도에 따르면 학교의 언덕배기 입구 앞에도 버스정류장이 존재하고 버스가 정차한다고 합니다만 버스정류장이 있음을 알리는 그 어떤 표식조차 찾을 수 없었답니다.


물론 이 버스도 여기저기 시골마을을 죄다 비집고 다니는 완행인지라.. 사실상 아산시내(온양)에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오기까진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리라 느껴집니다.


넓은 도로 주변으로는 황금들판 사이사이 드문드문 검은 벌판도 보이더군요.


백미들 사이에서 자라는 흑미입니다. 무농약으로 재배를 한다는지라 잡초들도 드문드문 보입니다.



활주로같은 직선주로를 타고 오면 우측으로 길이 굽어집니다. 


그러고는 이런 난해한 공간이 나타나는군요. 이 애매한 공터같은 공간에서 근처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길과 학교로 올라가는 넓은길이 분기됩니다.



언덕배기에 있는 학교인데 왜 직선주로만 있나 했네요..


학교 정문으로 향하는 언덕구간이 시작됩니다. 작은 간판이라도 혹은 개선문처럼 으리으리한 정문이라도 하나 세워둘법 한데 그런거 하나 없이 조용한 분위기입니다. 학교 앞에 걸린 현수막들도 빛이 바랜 경우가 다수였고, 전국체전 개최 D-100일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알리는 빨간 현수막은 여태 걸려있습니다.


P.S 아산에서 개최되는 전국체전은 이제 채 한달도 남지 않았습니다.



차를 타고 천천히 올라갑니다. 


학교 입구 주변 언덕배기 역시 순수농업지대와 묘지 그리고 잡종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학교 입구 언덕배기에서 쉽게 보이는게 묘지의 봉분인지라 오밤중에는 학생도 교직원도 학교 건물까지 올라가기 상당히 무섭게 느껴질거라 생각됩니다.



알  림 


학교 보건법 제5조 및 동법시행령 제 3조, 같은법 제6조 1항에 의하여 학교로부터 200m 이내에는 정화구역으로서 교육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설, 행위등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반할 경우 '법'제19조에 의하여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리오니 이점 양지하시고 묘지 조성 시 200m 밖에 설치 할 수 있도록 협조바랍니다.


아산서남대학교 총장


그러합니다. 곳곳에 보이던 묘지는 캠퍼스 조성 전부터 그 자리에 소재했던지라 어쩔 수 없다지만, 학교측에서도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던 부분이 아녔나 싶습니다. 그런고로 학교 반경 200m 이내에는 묫자리를 쓰지 말라는 알림판까지 세워두었네요.



학교로 올라가던 언덕에 동네 개(犬)들이 보입니다.


평화롭게 쉬고있던 시간을 방해해서 참 미안하더군요. 그물망이 쳐져있는 공간은 구조로 보나 형태로 보나 야구장으로 보이는데, 사용하지 않은지 꽤나 오래되어 잡초들만 무성합니다. 야구공이 담긴 플라스틱 박스를 제외하면 대부분 야구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시설의 유지보수에 쓰이는 손수레나 삽을 비롯한 건축자재들입니다. 


참고로 서남대학교 아산캠퍼스에 야구부가 존재합니다. 2013년 창단하여 2016년까지 꾸준히 대학야구 리그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최근 경기기록을 보자면 9월 2일 연맹회장기 경기에선 강릉영동대에 8월 8일 대통령기 경기에서는 성균관대에 콜드게임패를 당했습니다. 교직원들과 학생들의 사기진작을 위해서라도 꼭 분발해서 좋은 결과를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학교 본관으로 쓰이는 봉황관 건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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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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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폐교탐방 시리즈.


부실경영 혹은 이사장의 횡령등으로 문을 닫은 대학교를 전문적으로 탐방하는 블로거는 아마 저 말곤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고전짤을 돌고 돌게 만들어주신 그 분들도 계시긴 하다만, 비교적 최근에 이러한 폐교들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저 혼자라 자부 할 수 있습니다.


뭐 제가 올렸던 글에서 같은 시기에 학교 앞 같은 원룸에 사셨던 이웃분들이 댓글로 조우하던 경우도 있었고 여기저기서 폐교들의 근황이라며 불펌되고 있습니다만 가져가셔서 꼭 출처정도는 표기를 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 외에도 명신대학교와 성화대학은 수년 전에 직접 방문했었지만, 남은 사진이 없네요. 


여튼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논산시 연산면에 소재한 '한민학교'입니다. 한민대학교라고도 잘 알려진 이 학교는 사실 정식 대학이 아니라 4년제 학력인정 학교였습니다. 정식 4년제 대학처럼 홍보를 하다가 시정명령을 받았던 전력이 있고, 여타 다른 폐교들처럼 사학비리로 망해버린 학교라지요.


뭐 다른 폐교들의 경우 주변 대학에서 편입학이라도 잘 받아줬지만, 한민학교의 경우 정식 4년제 대학도 아니던지라 편입학에도 큰 어려움이 따랐다고 하더군요.



논산 초입(논산대교)에서 딱 15km


논산에서 계룡,대전방향으로 1번국도를 타고 가다가 연산면 소재지로 들어오면 한민학교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2013년 8월 31일자로 폐교된 학교입니다만, 폐교 이후로 약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학교의 소재를 알리는 이정표는 굳건히 서 있습니다. 딱히 찾아서 갈 사람도 없는데 말이죠.



평화로운 연산면 소재지 끝자락. 한민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매일같이 드나들던 시내겠지요.


물론 사소한 먹을거리를 사러 나가더라도, 장을 보러 나가더라도 학생들은 버스 아니면 기본요금 이상 나오는 택시비를 지불하고 나갔으리라 생각됩니다. 애초에 정원이 그리 많지도 않던 학교였고 암만 기숙사가 있고 학생들이 있다 한들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지방도를 타고 양촌면 방향으로 가다 보면 우측에 학교를 알리는 돌간판이 보입니다.


석재 가격이 한두푼도 아니고, 사실상 잘게 부수어 골재로 사용하지 않는 한 재활용도 불가한 품목인데.. 폐교된 학교 치고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아름다운 돌간판이 입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간판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방향을 선회하면 정문이 떡하니 보이더군요.



"한민족을 안고 세계로"


학교법인 한민족학원이 세운 개신교계열의 학교입니다. 황산벌 캠핑장 홍보용 현수막에 가려져 있습니다만, 하나님이 주인이신 대학이라는 문구도 함게 적혀있다고 하는군요. 보통 폐교된 대학들을 보자면 역사와 전통이 짧고 돈벌이를 위해 남발한 대학들이 대부분입니다만, 한민학교의 경우 대학치고는 나름대로 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였습니다.


1959년 미국의 선교사가 세운 대전신학교가 모태가 되어 한성신학교라는 이름으로 83년에 4년제 학력이 인정되는 학교로 자리잡은 뒤, 1989년 대전 시내에서 현 위치로 학교를 옮겨왔다고 합니다. 나름 신학과 말고도 다른 학과들이 존재하는 한민학교라는 이름은 2000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하는군요.


P.S 차라리 대전에 계속 있었더라면, 학교가 망하더라도 부동산 처분이 용이했을테고 정식 4년제 대학으로 신분상승 또한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민족학원의 동판은 잘 살아있습니다만, 한민학교 부분은 무언가로 가려두었습니다.


옛 아시아대학교처럼 정문만 요 앞에 내려와 있을 뿐, 마을의 진입로로도 활용되는 그런 도로입니다.



그래도 시골 부락이 소재해 있고, 대학이 존재하니 버스가 다니긴 합니다. 


논산시의 316번 시내버스가 이 노선을 운행하는데, 종점인 한민대까지 가지 않고 바로 아래 신양1리 정류장을 사실상 종점으로 보고 휴차합니다. 한민대 언덕배기까지 올라가봐야 아까운 연료와 기사아저씨의 노동력만 손실되고 탈 사람도 귀신 말고는 없는데 말이죠. 가뜩이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음산한 학교 앞에서 누가 쉬고싶겠습니까.



학교로 올라가는 길목. 평화로운 들판과 농촌마을이 존재합니다.


어느정도 가다보면 민가와 전답도 죄다 사라지고, 관리가 되지 않아 개판인 산을 구불구불 올라가네요.



열심히 올라왔습니다.


버스정류장은 왜이리 깔끔하게 지어둔걸까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이미 덩쿨에 점령된지 오래입니다. 버스를 탈 사람이 있어야지요. 귀신말고 누가 버려진 학교 하나 있는 저 산중턱에서 버스를 타겠습니까.



버스정류장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도 꽤나 멉니다.


약 300m 이상 내려와야 존재하는 버스정류장. 그 버스마저도 하루에 여섯번 왕복하는게 전부입니다. 막차가 5시인지라, 다섯시가 넘어가면 그냥 뭐 무서운 산길을 걸어내려가던지 택시를 타야했겠지요.



오토캠핑장이 학교 부지 전체를 사용하는 줄 알았습니다만, 입구 근처 일부 부지에 존재합니다.


2010년 로드뷰를 확인해보니 본래는 학교 부지 앞 보도블럭이 깔린 공원이였습니다. 뭐 학교도 사실상 버려지고 누군가에 의해서 캠핑장으로 재탄생되었더군요. 일요일 오후임에도 오토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좀 있었습니다.



캠핑장을 뒤로하고 길을 따라 쭉 올라가 봅니다.


한반도 모양의 돌간판과 관리가 되지 않아 수풀이 무성한 길을 따라 들어갑니다. 사진상으로는 그저 그렇습니다만, 혼자 들어가려 하니 등골이 오싹합니다. 무섭습니다. 카와이한 처자라도 데려왔으면 무서워도 손이나 잡고 들어갈 수 있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하니 혼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게 길인지.. 싶습니다. 보도블럭이고 나무고 잡초고 이미 경계를 잃은지 오래.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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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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