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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요 몇주동안은 움직이는 일이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강 정리해보니 이정도군요. 


10월 25일. 단국대학교병원 재활의학과 외래 (미션수행완료)

10월 26일. 단국대학교병원 의무기록지 사본 및 통원증명서 발급 (정형외과)

10월 27일. 상명대학교 학보사 아이디어회의 (충정로)

10월 30일. 가톨릭대학교 성바오로병원 정형외과 외래 (청량리)

11월 첫째주 중. A-1렌트카 신차 시승 예정 (벨로스터 or K7)

11월 5일. 대전충남지방병무청 징병검사 재검 (3차)

11월 6일. 단국대학교병원 내과 수면내시경검사 및 외래진료


그리고 요즘 불규칙적인 식생활이 계속되다보니 위가 자꾸 아프길레 내과 진료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오늘 오후시간대의 절반 이상을 병원에 있게 되었네요. 그 뒤에 기업은행이 8시까지 정상영업을 한다는 말에 조금 늦었지만 애드센스 환전을 하러 갔었지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풀어보도록 하지요.



가장 최근에 이곳으로 왔던게 아마도 7월 말 쯤으로 기억합니다. 


6월 말쯤에 재활의학과에서 운동치료를 마무리 하고 집으로 내려와서 헬스장을 다녔지요. 그리고 신검 즈음에 해서 한번 외래를 갔던게 가장 최근일겁니다. 그 3개월의 시간동안 단국대학교병원에 달라진 점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국제의료기관인증위원회(JCI) 평가인가를 거치고 중부권 최초로 인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6월 어느날에 양복을 입은 어느 흑인 아저씨를 중심으로 수행원들이 잔뜩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설명해주던데 아마 그게 평가 과정이였나 봅니다.


여튼 그렇게 10월 25일날 재활의학과 외래진료 결과는 이렇습니다. 다리의 활동각도는 7월과 크게 달라진것은 없었지만 생활하는데에는 무리가 없고 뛸 수 있고 이리저리 이전보단 더 걸어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활동성은 어느정도 나아졌다는 점 이였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크게 지장은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튼 가는길에 6월까지 재활치료를 맏아주었던 치료사선생님을 만났는데 뒤에서 보니까 아직도 조금 티가 난다고 하더군요.. 저는 나름 뛸 수도 있고 해서 조금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앞으로 제가 운동을 하는 것 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여기 재활의학과에서도 서울 정형외과에서도 병원에서 해 줄 수 있는건 거의 한계치에 왔다고 합니다. 나중에 혹시나 더 불편해지면 그때 다시 오라고 하더군요.


여튼 25일은 재활의학과 서류를 다 떼서 시험을 보러 학교로 왔습니다. (조금 늦게 들어왔지요.)



오늘은 단국대 정형외과 자료를 뽑으러 왔습니다.


사실 동네 병원에서 처음 단국대병원으로 올라왔다가 여러 검사를 거친 뒤에도 큰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듣고 CT검사의 예약을 잡아놓았을때 서울 응급실로 올라가게 되었지요. 그 이전에 외래 기록이랑 이후 다시 천안으로 내려와서 약 2회정도 단국대 정형외과를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자료를 가지러 왔습니다. 예약환자들이 많다보니 한참을 기다려가지고 의사선생님을 뵙고 자료를 받아올 수 있었네요. 대학 입학하고 불과 며칠 되지 않았을 그 때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기억납니다..


난 아픈데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할 때.. 꽤병같았지만 진짜 아팠던 그 때....



먼저 무인수납기에 가서 수납을 하고 가라고 해서 무인수납기를 거쳤지만, 무인수납기는 창구로 가라고 하네요.. 여튼 요즘 위가 좀 아프다보니 내과 진료의 수납을 먼저 해두고, 의무기록 사본과 제증명을 발급받는 창구로 갑니다. 사실 전날 재활의학과 외래때문에 방문했었지만 시험시간이 촉박하다보니 그냥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날 한번에 처리했다면 두번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말이죠. 



본인의 신분증을 건네주고, 데이터를 찾아서 서류를 건네주는 방식입니다. 


지난번 7월 2차 재신검때 서울에서 두꺼운 의무기록지 사본을 받아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더군요. 그만큼 굵은 양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장수는 나옵니다. 물론 발급 수수료는 3000원입니다. 당시 x-ray와 Bone Scan 검사의 판독결과용지를 보니까 정상 혹은 콩팥이 양쪽 다 있음 그런말밖에 없더군요. 조금 더 심해져서야 검사에서도 나오곤 했나 봅니다. 그리고 이 앞에 소화기내과와 외과의 진료실이 있다보니 바로 앞으로 들어가서 대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깔끔하게 리모델링이 되어있는 편 입니다.



소화기내과에 왔는데 여긴 대기자가 더 많습니다. 반대편 외과 진료실은 매우 한가했지만, 소화기내과 진료실은 찾는 사람들도 많았고, 저처럼 새로 진료를 받기 위해 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대기실에 앉아서 KBS의 시사교양프로그램 의뢰인K를 재미있게 보다보니 약 한시간정도가 흐르고 제 차례가 오더군요. 요즘 식사가 불규칙해진것도 있고 해서 위가 너무 아프다고 하니 내시경을 찍어보자고 합니다. 처음엔 일반 내시경을 권하시던데, 워낙에 일반 내시경이 죽을맛이라는 소문을 많이 들어서 수면내시경은 안되냐고 의사선생님한테 반문하니 그럼 그렇게 하자고 하더군요. 그렇게 내시경실에 가서 편한 날짜를 잡고, 약을 받아서 왔습니다. 검사비 결재는 체크카드 잔액이 부족해서 다음으로 미뤘군요.


약도 무슨 세개씩이나 번거롭게 있었고, 식전 30분에 먹는 약부터 시작해서 여튼 약을 일주일치 먹고 그 다음주 화요일에 검사를 하고 외래를 다시 보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수면내시경이지요..


여튼 오랫만에 단국대병원에서 참 오랜시간을 있었습니다. 병원이야 가까이 하면 할수록 좋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 올해 너무 병원을 가까이 한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꼭 병원과 거리를 두는 한해가 되었음 좋겠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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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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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고와 표현"과목의 과제를 위해 작성된 글입니다. 몇회에 걸쳐 서론 본론 결론을 도출해내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해오다가 최종적인 작품을 만드는것이였는데, 나름 좋은작품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블로그에 포스팅으로 남겨놓습니다. 


지난날, 내게는 생전 들어도 보지도 못했던 병이 찾아왔다.

누가 봐도 멀쩡하고 지극히 정상적이던 내가. 자라면서 큰 병치레는 거치지 않았던 내가. 의료보험도 적용되지 않는 검사를 의학용어까지 생소해하지 않아하면서 받는 사람이 되어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부터 단순히 근육이 뭉친 듯 했던 통증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고 걷기조차 고통 때문에 못하는 상태까지 이름모를 병은 악화되었었다. 그렇게 병원으로 오게 된 나는 그저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큰 일이다보니 그냥 병명도 모른채 진통제에만 의존하며 병상에 누워서 다들 개강파티와 환영회로 즐거워하고 있을 시점에도 병원 티비만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에 간지 사흘 뒤에 예약이 밀려있는 이 병원 대신에 의정부까지 엠뷸런스를 타고 원정을 나가 암 검사까지 마친 뒤에야 병명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본격적인 치료에 임하게 되었다. 그렇게 입원해서 다른 환자들이 퇴원하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며 한달여의 기간동안 치료에 임하게 되었고, 빠른 호전증세를 보여 지금의 모습까지 오게 되었다. 물론 아직 다리를 사용하는 것이 이전처럼 아무런 무리가 없고 편하지는 않지만, 재활치료 경과도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7월 안에는 재활치료도 뗄 수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긴 터널의 끝이 보이고 있긴 하지만 불과 병원에서 학사경고를 면하기 위해서 퇴원했을 시점만해도 나는 끝이 없는 어둠속을 헤메는 미아같은 존재였다.

 

즐거운 병원??

 

살면서 겪어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고통은 그래도 이겨냈다. 하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왔던 나는 그렇다고 병이 다 나은 상태도 아니였다. 그냥 좀 더 병원에 있었어야 했는데 학사경고가 무섭다며 담당 의사선생님께 퇴원좀 시켜달라고 말했던 단지 학교가 가고싶었던 거동이 불편한 환자였을 뿐이였다. 그렇게 기대와 환상을 가지고 한달여의 공백을 깬 뒤에 돌아간 학교에 대한 환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해 깨지고 말았다. 대학생활은 일주일밖에 못해보고 시간이 멈춘 듯이 시간개념도 사라지고 그동안의 생활패턴도 모두 잃고 병원 한구석에 쳐박혀있던 내가 기대하는 것은 그냥 이상적인 상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단 무엇보다도 중간고사는 바로 앞에 있었지만 오리엔테이션만 들은 과목을 비롯해서 내가 배운것도 거의 없었을뿐더러 동기들은 그동안 많은 과제를 수행하고 MT를 비롯한 많은 행사를 거치며 많이 친해져있었다. 나는 목발을 짚은채로 열심히 강의실과 건물을 옮겨다니고, 졸긴 했어도 열심히 수업을 듣는 정보통신공학과 12학번의 그나마 존재감은 잊혀지지 않았던 어느 일원이였고 다들 보기에도 조금씩 적응해나가려는 다리는 좀 아픈 친구였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러한 모습과는 달리 속에서는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뭐가 뭔지 모른다는 자괴감에 휩싸여서 혼자 고뇌하고 혼자 괜한 상상을 해오곤 했다. 그러한 상상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휴학충동을 비롯한 지금 생각해보면 셀 수 없는 많은 충동을 느끼고 살아왔다. 남들에 비해 한달 뒤쳐진. 그러니까 다른 동기들은 4월의 학생이고, 나 혼자만 3월에 정체되어있는듯한 느낌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혼자 마음속으로 고뇌하고 그냥 내 자신이 싫었다. 아픈것도 물론이요. 학교도 모든 것도 다 원망스러웠다. 이러한 현실을 벗어날 방법은 기약없는 완치뿐이 없었고, 지금 당장이야 터널의 끝이 보이는 시점이라지만 당시에 나는 그냥 기약없는 완치를 포기하고 될대로 살으라는 생각도 하곤 했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 대한 환상만 가득했던 환자에서 삶의 의욕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혼란스럽게 살고있었다. 나 혼자만 이렇게 속으로 고뇌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는것도 아니다. 아마도 삶에서 의욕이란 찾아볼 수 없는 정신상태 덗분에 재활을 비롯해서 치료 전반에 슬럼프가 잠깐 찾아오기도 했고 주변사람들까지도 힘들게 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속에서 누가 보던 말던 블로그나 페이스북 그리고 혼자 지나가는 말로 아니면 내가 병원에 있을때부터 간간히 근황을 물어오는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카톡으로나마 신세한탄을 하고 지내왔다. 그렇게 자신을 한탄하며 카타르시스를 분출하는 것으로 더 악화될 수 있었던 정신적인 방황은 막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큰 진전이 없던 그날도 마찬가지로 신세한탄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한 나를 본 명언을 좋아하고, 고등학교때도 칠판에 명언을 적어놓던(다들 저게 뭐냐면서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친구가 페이스북에 댓글을 달고 갔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나를 흔히 말하는 멘붕상태에서 어느정도 빠져나올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해주었다.

 

초저녁 병원복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지금의 아픔은 이후 큰 자산이 될 것이다.

 

누가 한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는 우연히 듣게된 명언을 계기로 먼 훗날 지금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그를 이겨내고 회복하려는 노력등이 먼 훗날 큰 자산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투자라는 생각과 함께 작은 희망을 가지고 조금이나마 심리적 압박감을 덜을 수 있었다. 지금은 고통이지만 나중에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그날을 생각하며 불합리하고 정말 절망과도 같았던 나 혼자만의 자괴감을 희망을 가지고 떨쳐낼 수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현재로써 말하자면 정신적인 고통은 거의 다 덜어냈고, 육체적인 고통도 많이 덜어내서 지금은 그 당시에 비한다면 정말 황송할만한 상태까지 오게 되었다. 긍정의 힘이라고 했던가.. 워낙에 극단적인 사고를 좋아하고 평소에도 반대로 뒤집어서 생각해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간간히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사고가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현실을 극복해나가려 노력하다보니 나도 차츰 바뀌게 되었고, 조금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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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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