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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올드카 목격담은 토요일에 서울에 다녀오며 서울 시내에서 봤던 차량들의 목격담입니다.


둘 다 대우차고, 최소 한 번 이상 다뤘던 차량이기에 간단히 몰아서 다뤄보려 하네요. 먼저 한남대교를 건너며 목격했던 대우자동차의 후륜구동 중형세단 프린스입니다. 간간히 다니다 보면 도로 위에서 보이는 올드카 중 하나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서울에서 굴리던 차량이라 그런건지 매우 우수한 보존상태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린스의 최고사양인 ACE네요. 94년 12월에 등록된 차량입니다.


2.0 SOHC 엔진과, 60년대 개발된 V플랫폼으로 만들어져 대우의 로얄 레코드부터 꾸준히 우려먹던 차체. 당시 동급 차량 대비 가장 좁은 전폭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여러모로 열세를 보이긴 했지만, 고급 모델인 브로엄과 함께 나름대로의 택시수요로 세기말까지 판매되었습니다.


여튼 프린스가 매우 깔끔한 모습으로 달리고 있어 비슷한 속도로 따라갔습니다.



'서울31 나' 지역번호판. 중구에서 최초로 발급된 지역번호판입니다.


최초 발급시에는 아마 한자리수 지역번호판을 부여받았을테고, 주인이 변경되었거나 타지역으로 전출을 나갔다가 돌아와서 번호판이 바뀌지 않았을까 추정됩니다. 배선은 없지만 작은 HAM용 안테나도 달려있고요. 2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마 아파트나 차고에서 극진히 모셔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유의 알루미늄 휠 역시 별다른 백화 없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매우 각졌던 로얄에 비하면 곡선이 다수 들어가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동급 차종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을 보이던 쏘나타2에 비한다면 각지고 노티나는 디자인입니다. 부식 하나 문콕 하나 없이 매우 깔끔한 상태로 자신보다 최소 20년 이상 어린 차량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프린스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갈 길을 갔습니다.


차령 30년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촉매가 장착된 휘발유차라는 이유에서 4등급 차량입니다. 물론 같은 시대 태어났던 경유차들이 적폐로 몰려 싹 다 사라진 상황에서도 4대문 안이라는 중구에 별 문제 없이 등록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전혀 통행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겠지요.


2030년까지 4대문 내 내연기관 자동차의 출입을 제한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때까지 생존하여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사랑받았던 만큼 앞으로도 사랑받으며 서울을 누비고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양재대로에서 누비라를 목격하였습니다.



누비라입니다. 순 우리말 이름으로 교과서에도 오르내리는 차량이지요.

대우자동차의 독자개발 모델이자, 지금은 폐쇄된 군산공장에서 생산된 첫 차종입니다.


지금은 부식으로 리어 쇼바마운트가 철판을 뚫고 올라오는 치명적인 결함과 수출로 인해 쉽사리 볼 수 없지요. 당대 경쟁차종인 구아방이나 세피아보다 훨씬 더 넓은 실내공간을 주로 내세웠고, 독일 ZF사의 4단 자동변속기를 채택하여 변속기만큼은 최고의 내구성을 자랑했습니다.


라노스에 이어 패밀리룩인 삼분할 그릴이 적용된 두번째 차량이고, 바로 다음달 출시된 레간자까지 3분할 그릴을 적용하여 대우자동차의 패밀리룩이 완성되었습니다. 지난해 고인이 된 김우중 회장님께서 세기말 자동차 산업에 의욕적인 투자를 하던 시기에 탄생했던 걸작이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숙한 차를 모토로 디자인 했다지만, 별다른 특색도 없고 린번엔진을 앞세운 아반떼의 공세에 밀려 2년만에 싹 다 뜯어고친 누비라2로 부분변경 전까지 대략 2년간 판매되었던 초기형 누비라입니다. 이 차량은 98년 4월에 최초로 등록되었던 차량이네요.



지하도 공사로 혼잡한 양재대로에서 자신보다 못해도 15년은 어린 차들 사이를 달리고 있습니다.

번호판은 '서울52' 강남구에서 발급되었던 번호판입니다.


22년의 세월을 대변하듯 문콕이라던지 자잘한 기스들의 모습이 흔히 보였습니다. 앞 휠커버는 떨어져 나간지 오래였고요. 서울에서만 굴렸던 차량이라 그런지 당시 대우차가 부식에 매우 취약했었음에도 육안상 보이는 부식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오랜 세월 굴러다니는게 어디냐 싶은 생각이였습니다.


'J100'이라는 코드네임으로 야심차게 개발되었던 대우의 준중형차 누비라는 대우의 세계경영을 이름속에 그대로 품은 차량이 아닐까 싶습니다. 후속 라세티는 대우에서 개발했음에도 GM에 인수되어 경제위기속에서 세계로 뻗어나가 GM을 먹여살리던 효자차종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후속모델은 친환경 자동차로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결국 단종되고 말았습니다.


대(代)도 끊겼고, 태어났던 공장도 사라졌습니다. 많은 형제들은 수출길에 올라 한국땅을 떠났거나 폐차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누비라는 복잡한 서울의 도로를 힘차게 누비고 있었습니다. 상태만 놓고 본다면 그리 오래 살아 돌아다니지는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앞으로 남은 세월 힘차게 도로를 누벼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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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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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정부여당 지지자도 아니며, 논란에 대해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조선시대 한양부터 대한민국의 서울까지. 역사상 가장 오래 시장으로 재임하던 故 박원순 서울시장님께서 지난 7월 9일 갑작스레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비서에 대한 성추행 의혹으로 경찰이 내사에 착수한 사건과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아직까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유서를 남기고 산으로 떠나셨다고 합니다. 


불과 전날만 하더라도 직접 브리핑에 나섰던 분이지만, 갑작스러운 비보가 믿기지 않더군요. 10년 가까운 서울시장 재임 당시 대중교통과 보행자 친화적인 정책을 펼치던 것은 좋았으나, 차선을 줄이고 차량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꼬이게 만들어 차를 놓고 나오게 한다는 교통정책과 맹목적인 친중행보는 제성향과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젊은층 사이에서 사진이 마치 욕이 바로 튀어 나올 것 같다는 의미에서 '씨발아저씨'라 부르는 데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대인배적인 행보와 어느정도 보여주기에 기반했다지만 시도했었던 공공자전거나 심야버스와 같은 정책들은 타 지자체에도 벤치마킹되어 복지사회에 한 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튼 8년 전 일입니다만, 박원순 시장님을 뵈었고 대화를 나누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2012년 1월 얘기인데, 취임 100일을 맞이하여 블로거 간담회를 진행했었고 그 자리에 참석했었습니다. 뭐 제게 서울시 공무원으로 스카웃하고 싶다는 농담스러운 덕담도 해주셨고, 그 자리에서 제가 촬영했던 사진이 꽤 오래 위키피디아의 박원순 문서에서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2012/02/04 - [티스도리의 기획연재물] - 120203박원순 서울시장님을 만나뵙다! (1) 찾아가는 길

2012/02/06 - [티스도리의 기획연재물] - 120203 박원순 서울시장님을 만나뵙다! (2) 안녕하세요 시장님!


당시 간담회에 관련 기사에서의 언급 - https://news.v.daum.net/v/20120203230206772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밝힌 김정수(20)씨는 "희망씨앗 중 버스의 어두운 내부조명을 밝은 LED로 교체한다고 들었는데 기사들의 안전운전에 방해되는 것은 아니냐"고 지적했다. 


박 시장은 "차안이 밝으면 기사가 힘들 수 있다는 생각까지는 해보지 못했다"며 "너무 좋은 지적사항을 냈는데 서울시 공무원으로 탐난다"고 진심어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한참 아프기 직전 2월의 글이네요. 직후 크게 아픈 이후 글을 쓰는 성향도 많이 바꼈습니다.



제가 촬영한 이 사진이 다양한 언어판 위키피디아의 박원순 문서에서 꽤 오래 사용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언어로 된 문서에서 제가 촬영했던 사진이 꽤 오랜세월 사용되었으니 영광이였지요.


지금은 다른 사진으로 변경되고 포르투갈어 위키피디아 문서를 제외하면 제가 촬영했던 사진은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꽤 오랜세월 전 세계인에게 박원순 서울시장이 누구인지 알리는 사진이 제가 촬영했던 사진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고 저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박원순 시장님께 저는 그저 기억도 나지 않는 타지역 주민이겠지만, 제 삶에 있어서는 시장님을 뵙고 대화를 나눈 일이 꽤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더 큰 사람이 되진 못했고 아픈 뒤 잉여로 살고 있지만 제게 큰 힘을 줬던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논란과는 관계 없이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게 예의라 생각하여 서울시청 앞 광장에 시민분향소가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차를 타고 마지막 가시는 길 인사를 드리기 위해 먼 길을 다녀왔습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故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을 추모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인터넷상의 논란과는 무색하게 어린아이와 함께 온 부보님도, 나이 든 어르신도 계셨고 여러모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시민분향소를 찾은 모습이였습니다. 제가 시민분향소에 도착한 시간은 11시에 분향소가 열리고, 대략 두시간정도 지난 1시 즈음이였습니다.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위해 찾았습니다.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해 조문객들은 거리를 두고 줄을 섰습니다.


광장 잔디밭을 둘러싸고 청테이프로 라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앞사람과 거리를 두게 만드는 선을 따라 광장을 빙 돌아 분향소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조문인파에 놀랐습니다. 중간중간 공무원들이 앞으로 이동하라며 줄을 선 조문객 관리를 하고 있었고,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없었습니다.



대략 15분정도 줄을 서서 기다리니 천막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천막 안에서는 세줄로 나누어 들어간 뒤 인적사항과 전화번호를 작성하고 순서대로 조문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두었습니다. 한 줄에 대략 10명씩 시장님을 뵙고 묵념을 하고 방명록을 작성하러 가는 방식으로 조문이 이루어졌습니다. 묵념을 하며 시장님께서 기억하시지도 못하겠지만 제 인생에서 만들어 주셨던 좋은 추억들 감사드리고, 좋은곳으로 편안히 가시길 기도했습니다. 



조문을 마친 뒤 방명록을 작성합니다.


뭐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도 고향인 창녕에도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하니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옛 현대종합상조. 프리드라이프에서 장례 절차를 진행하는듯 보이더군요. 방명록에도 묵념하며 기도했던 내용과 비슷한 이야기를 적고 박원순 시장님의 명복을 빌고 왔습니다.


물론 공적도 존재하고 과오도 존재합니다. 무조건 좋은 사람이다 혹은 나쁜 사람이다 말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많은 정치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지만 정부여당을 지지하지 않는 제 입장에서도 먼 길을 찾아와 조문을 했을 정도로 마음아팠던 일은 처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람에 따라 평가는 다를겁니다. 논란으로 인해 조문을 가지 않겠다는 정치인들도 있고, 서울특별시의 세금으로 장례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여론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으로 크다는 사실 역시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변호사로 활동하고 시장으로 재임하며 나타났던 성과들에 대한 공적이 기려지듯이, 앞으로의 정의를 위해서라도 애도기간이 끝난 뒤 권력을 앞세운 과오 역시 밝혀내야만 할 것입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던 고향 선배인 홍준표 국회의원도 진심으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홍준표라는 사람이 자칭 깨시민들에게 이제 밥값한다며 웃음거리가 되는 모습도, 그렇게 정의롭다는 사람들이 엄한 비서를 찾아 인민재판을 하는 모습도 모두 원하지 않으실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故 박원순 서울특별시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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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29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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