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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지난 줄거리 요약


비행기를 타고 신 치토세 공항에 도착한 뒤, 레일패스를 끊어 삿포로행 급행열차를 타고 삿포로시에 도착한 티스도리. 무거운 짐이나 좀 떨궈보자며 호텔로 향했지만, 체크인 시간이 되지 않은지라 체크인은 하지 못하고 밥을 먹으러 나갔다 오며 시계탑을 발견합니다. 시계탑을 발견하고 입장료를 내고 시계탑을 구경한 뒤 체크인을 마치고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된 그는 빨간 벽돌조 건물인 구 도청사를 향해 가게 되는데..




문화재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존재합니다.


중요문화재 구 도청 본청사


붉은 벽돌이라고 불리우는 북해도청 구 본청사는 1888년에 북해도 행정의 거점으로서 건설되었습니다. 도청의 기사들에 의해 디자인된 이 미국식 네오바르크양식 건물은 북해도의 건축 자재를 풍부하게 활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건축 당시에는 일본에서 몇 개 안 되는 대단히 드문 고층 건축물이었습니다. 화재가 있어 1911년에 개축, 그 후 1969년 3월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구 도청사에 대한 설명을 적어 둔 표지판입니다. 보시다시피 미국의 네오바르크 양식에 따라 만들어진 서양식 건축물이지만, 건축에 필요한 자재들은 수입 없이 홋카이도에서 공수해서 만들었다 합니다. 


요즈음 양산형 건축물을 지을때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위한 목적이 아닌 단가때문에 수입산 자재를 쓰는 경우도 많은데, 그 당시 홋카이도 도민 그리고 개척사 직원들의 열정이 엿보입니다.



아카렌가 청사 (중요문화재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


입장은 무료. 다만 내실은 꽤 알찹니다.


1층에는 홋카이도 역사 자료 갤러리(문서관 전시실)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문서관 열람실이

2층에는 기념실과 홋카이도 박물관 분관. 사할린 자료실, 북방영토관 국제교류관등이 있습니다.


관광객의 출입이 제한된 몇몇 공간을 제외한다면, 입장료 없이 꽤 많은 걸 보고 누릴 수 있습니다.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 정원의 수목 맵


번역투가 상당히 애매하게 나왔습니다만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 주변으로는 나름 규모있는 정원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제가 간 시점이 우리나라 2월 말에서 3월 초 날씨인지라 정원에 아름답게 피어난 꽃도 풀 한포기도 없이 황량하기만 했습니다.


여튼 소개에 따르면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의 정원에는 약 100여종 1,000그루의 수목이 심어져 있어 계절에 따라 다른 풍경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뭐 제가 보고 온 것도 계절에 따라 다른 풍경 중 하나겠죠.



바람이 거세게 부는 정원에는 그 어떤 카와이한 처자도 없었습니다.


단지 토요일임에도 뼈빠지게 일하고 바쁘게 퇴근길에 오르는 스시남 아저씨들만 지나갈 뿐이고, 저같은 관광객들이나 이래저래 둘러보고 갈 뿐이죠.



LED 조명은 죄다 철거가 된 상태. 


기나긴 북해도의 겨울을 보낸 나무들에겐 아직까지 짚단이 쌓여 있는 상태입니다.



4월 말에 한번 더 폭설이 내렸다 합니다만.. 부디 나무들이 잘 살아있길 바래봅니다.



건물 주변에는 자전거도 불법주차가 되어있습니다.


의외로 시내를 지나다니다 보면 자전거 주차 금지구역도 존재하더군요. 게다가 거센 바람에 잘 쌓여있던 낙엽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건물 구석으로 몰리기 시작합니다.



100년이 넘은 건물임에도 피뢰침이 존재합니다.


작은 굴뚝처럼 보이는 부분은 환기탑이라고 하는군요. 그 외에도 천연 슬레이트로 만들어진 지붕이 올라가 있고, 약 250만개의 삿포로제 벽돌을 프랑스 방식으로 조적했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더 확인합니다. 입장은 무료입니다.


암요 그럼요. 입장료가 단 한푼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홋카이도청에서 무료로 관광객들에게 개방해주는 그런 건물입니다.



건물 내부로 진입합니다. 


두개의 작은 아치와 정 중앙의 계단으로 이어지는 큰 아치. 그리고 엔틱한 장식문양은 전형적인 서양식 건물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단 역시 목조인지라 올라가고 내려가는 사람들로 인해 삐걱거리는 나무소리가 울려퍼지더군요.



관계자 이외의 출입을 금합니다.


분명 인기척은 들립니다만, 아마 관계자 분들이 들어가 계시겠죠. 출입을 금한다 하는데도 일부러 문을 열어보는 몰상식한 관광객은 없었습니다. 요즘 요커들에게 관광지가 되어버린 서울 모 대학이 출입금지 표지판을 아무리 붙여놓아도 무턱대고 들어오는 몰상식한 중국인 관광객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고 하는데 말이죠. 



방화문은 아마 후대에 와서 달아둔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화재로 한번 소실되었던 건물인지라 방화문의 존재는 더욱 더 중요하게 여겨지겠죠. 웬지 느낌상 60년대 복원 당시에 달아둔 느낌입니다. 1911년 건축 당시에 만들어 둔 방화문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P.S 언어만 능통하다면야 지킴이 봉사를 하고 계신 어르신들께 물어보겠는데.. 그러질 않으니..

 

9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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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도리

만 31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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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시계탑 1층에는 시계탑의 역사를 확인 할 수 있는 역사관이 있습니다. 비록 한국어 설명은 빈약하지만 그래도 간간히 간단하게 작성되어 있더군요. 간단하게 몇가지만 추려서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계탑의 연혁


시계탑은, 현재의 북해도대학의 전신인 삿포로 농학교의 연무장으로서 1878 년에 세워졌습니다. 연무장은, 강의실, 표본실, 실내체육장, 각종 행사장의 기능을 함께 갖춘 건물이었습니다.

1903 년부터 1940 년대 초까지는 교육단체의 사무소, 부속 도서관, 문화 활동의 장소로 이용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 년부터 전후의 1948 년까지는 군용시설, 각종 민간단체 사무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후 1950 년부터 1966년까지 시립도서관으로 사용되었고, 도서관 이전에 따라 1967 년에 복원 공사를 하였습니다. 1970 년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일본 구 제국대학 중 한군데인 북해도대학의 전신, 삿포로 농학교의 연무장 건물이던 우리의 시계탑은 1878년에 세워졌으며, 여러 용도변경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합니다.


근 150년 가까이 된 서양식 건물인 우리의 시계탑은, 학교 캠퍼스 내 부속건물이던 셈이죠.



그 외에도 북해도 대학의 전신인 개척사 가학교와 여학교등의 소개도 이어집니다.


북해도 개척사의 가학교로 1872년 개교한 초기의 학교 졸업생들은 북해도 개척과 관련된 사업에 의무적으로 종사를 하게 했답니다. 일본의 북해도 개척 당시 나름대로 큰 일을 했던 사람들은 이 가학교 출신이겠지요.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두번째로 여학교를 개교하기도 했답니다.


다만 가학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폐교가 되었고, 약 2년 뒤 삿포로시로 자리를 옮기며 삿포로 학교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개교를 합니다. 지금의 시계탑이 있는 자리 일원이 바로 삿포로 학교가 옮겨온 부지입니다.



1876년 3월. 농과대학이 개설하며 본격적으로 삿포로 농학교라는 명칭으로 출범합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농과대학의 학장이였던 미국인들을 교사로 고용하면서 본격적인 근대 고등교육기관으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미국인들이 당연히 메사추세츠 농과대학에 근무했던 교직원들인 만큼 당시 미국의 농업기술이나 메사추세츠 농과대학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가지고 오기도 했답니다.



개교 당시 삿포로 농학교의 모습



150년의 세월을 버티며 우뚝 서있는 연무장. 시계탑 건설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개교 당시 고용된 미국인 교장 클라크는 나름대로 학생들이 거주하는 기숙사라던지 연무장 강당 등 농학교의 시설 확충에 관심이 많았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부임한 휠러 교장대리가 구체적인 연무장을 포함한 여러가지 학교 건물의 건설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고 하네요. 


초창기 계획안 상으론 연무관 건물은 종루가 달린 2층 벽돌건물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결국 계획의 축소로 인해 2층 목조건물로의 건축이 결정되었다 합니다. 그렇게 1878년에 5월에 최종적인 건축허가가 나왔고, 그 해 6월 착공에 돌입합니다.



그렇게 농학교 연회장은 착공 4개월만에 완공되었고, 대학 본관으로의 역활도 겸했다 합니다.


다만, 처음 농학교 연무장 건물엔 시계가 없었습니다. 당시 개척장관이던 쿠로다 기요타카가 연무장 종루에 시계를 달아보라는 명령을 내려 탑시계를 장착하게 된 일이죠. 농학교 교장 직무대리인 휠러는 미국의 하워드社에 시계를 주문하였고 1879년 6월에 주문했던 시계는 도착했습니다.


다만, 시계 사이즈가 연무장 종루보다 훨씬 큰지라 다른 건물에 대신 설치를 하는 방안이 고려되었고, 결국은 교장대리 휠러의 설득 끝에 연무장 종루를 뜯어 고쳐서 탑시계를 달게 됩니다. 그렇게 1881년 8월 12일에 시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하는군요.


P.S 쿠로다(구로다) 기요타카는 일본의 2대 총리를 역임한 정치인. 우리에겐 운요호 사건을 매개로 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의 주역으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



당시 농학교의 교육과정은 메사추세츠 농대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고로 100%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였고, 당시 일본 최고의 영문학자도 배출했다 하는군요. 여튼간에 이게 일본인이 쓴 영문인지 미국인이 쓴 영문인지 그냥 봐선 모를 정도로 아름다운 필기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농학생들은 오전에는 4교시의 학습과 1교시의 복습시간, 오후에는 현장실습 위주의 수업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즈음 학교와 별 다를 것 없이 운동회 그리고 학예회까지 진행했다 하는군요.



札愰農學校創基25年祝典 (찰황농학교창기25년축전)


농학교 설립 25주년 축전 당시 사진. 재학생 그리고 교직원들이 지금의 시계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명치(메이지)34년이면 서기 1901년이죠. 쇄국정책을 펼치던 조선과 달리 서구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던 일본은 이 시절 사진 기록들도 우리나라보단 꽤 많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농학교 모형.


셔터스피드가 영 좋지 못했던지라.. 강의동과 관측대 그리고 실습을 위한 공간들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층 빌딩으로 뒤덮인 시계탑 근처입니다만, 그시절엔 작은 단층 가옥들 위주였네요.



보수공사 당시 떼어낸 건축 초기 자재들 역시 폐기처분 하지 않고 잘 보관하여 전시중입니다.



150년의 세월을 삿포로 시민들과 함께했다 보니 여러 문학작품 그리고 음반속에서도 시계탑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시계 기술자이던 이노우에 키요시씨는 96년 99세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약 반세기동안 시계탑 유지보수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삿포로를 대표하는 시계탑은 많은 시민들의 보살핌으로 오랜 세월 유지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2층으로 올라갑니다. 옆에는 장애인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건물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엘리베이터 박스를 만들었더군요. 몸이 불편한 사람일지라도 손쉽게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작은 공연장을 바라보고 있는 나무의자.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시계탑의 구조와 구동 원리를 설명하는 영상이 상영중입니다.



족히 30년은 넘어보이는 영상이지만, 관람객들은 집중하면서 아주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시계부분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


추를 달고 있는 로프가 보입니다. 물론 150년의 세월을 함께한 로프는 아닐테구요.. 분명 노후화가 되었을테니 못해도 대여섯번 이상은 교환해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작은 모형으로 커다란 시계의 구동모습을 똑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은 톱니가 움직이면서 큰 톱니도 움직이고 그렇게 로프를 감고 풀어가면서 시계바늘은 돌아갑니다.



시계탑 관람을 하고 나오니 4시에 가까워 지더군요.


고로 다시 호텔로 돌아갑니다. 호텔에서 잠시 쉬다가 또 열심히 돌아다녀야죠.


7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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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도리

만 31세 도태남의 처절한 삶의 기록. sinc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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